[홍기빈의 클로징] 변화의 속도와 음모론
글
홍기빈(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2025-07-03
미국, 한국, 세계 어디라 할 것 없이 가지가지의 음모론이 판을 친다. 미국은 몇년 전 파충류들이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주류 매체와 할리우드를 장악하고 있다는 ‘큐어논’ 이론이 창궐한 적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와 개표를 중국 공산당과 국내의 불순세력이 조작하고 있다는 부정선거론이 끈질기게 돌아다니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런 조악한 음모론들이 이렇게 강력한 신봉자들을 계속 끌어당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자아낸 불평등 그리고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불안감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음미하고 생각해볼 점이 많은 이야기임은 틀림이 없지만 중요한 맹점도 있다. 이 음모론이 삶이 피폐하고 불안정한 그리고 ‘교육 수준이 낮은’ 하층계급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선거론을 외치는 집회 현장에 가보면 명품 옷을 입은 상류층들도 있고 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들도 많다. 가질 만큼 가지고 배울 만큼 배운 이들은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고 불편하여 저 말도 안되는 각종 음모론에 탐닉하는 것일까?
사회는 항상 변화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와 방향이 항상 사람들이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고 그 변화의 규모와 깊이가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을 때도 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변화가 감당하기 힘든 속도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벌어질 때는 사람들 각자가 가진 적응의 의사와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이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세상을 열렬히 지지하고 찬양한다. 더 많은 숫자의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이야기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이전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황새 걸음으로 달려가는 변화를 뱁새 걸음으로 쫓아가기 위해 정신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서 배제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나는 이들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황당할 뿐이다. 이들은 변화의 복잡한 북새통 속에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름과 이야기들을 선별적으로 찾아내어 그것으로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압도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음모론이 나온다. 한국 사회의 변화는 빨라도 너무 빠르다.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바뀌는 일을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 안에서 경험했던 나라가 또 있을까. 특히 지난 10년간 벌어진 우리 사회의 변화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지나 또 다른 미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 중에는 자신을 대한민국의 주류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이 보기에는 한밤중에 계엄 사태가 벌어지고 몇달 후 전혀 ‘깜도 안되는 얼토당토않은’ 인물이 졸지에 대통령이 되는 사태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를 세상의 이치로 조리 있게 인과관계로 구성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하고도 경악할 만한 비밀로 설명해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음모론이 나온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음모론도 계속 새롭게 진화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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