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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칸에서 한국까지, 영화의 시차가 빚어낸 상상의 시간
송경원 2025-05-23

아는 책방이 문을 닫았다. 카페를 겸한 작은 공간 한곳에 사장님이 직접 고른 책 몇권을 비치해둔 곳이었는데, 책 사러 일부러 간 적은 없었 지만 우연히라도 들르면 뭐에 홀린 것처럼 꼭책 한권을 사서 나섰던 기억이 생생하다. 엄밀히 말해 문을 닫은 건 아니고 카페 영업만 하는 걸로 방침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만에 들러 아쉬운 마음에 차 한잔을 마시고 있자니 낯선 장소에 떨어진 기분이다. 인테리어는 거의 그대로였지만 그곳에서 책을 둘러보며 켜켜이 쌓았던 시간은 어느새 옛일이 되어버렸다. 종종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고 느껴지는 장소가 있다. 돌이켜보면 장소가 특별한 게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했느냐가 늘 핵심이었다. 움푹 팬 장소에 시간이 고이면 모두의 공간이 나의 장소로 거듭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금 저 멀리 프랑스 칸에서 영화 축제가 벌어 지고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 아리 애스터의 <에딩턴>, 린 램지의 <다이, 마이 러브>, 요아킴 트리에르의 <센티멘털 밸류> 등 올해의 쟁쟁한 작품들이 차례로 시차를 두고 국내에서 개봉할 것이다. 칸의 소식을 멀리서 전해 듣는 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미리 확인하는 기분이다. 쏟아지는 평가와 리뷰들을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을 더듬어보지만 실은 직접 보기 전에는 어떨지 모른다. 글로 만나는 영화와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영화는 매번 달랐으니 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달라서 재미있는 쪽에 가깝다. 문장으로 상상했던 것들이 구체적인 색채와 울림의 육체를 얻고 스크린에 안착했을 때 그 차이를 비교해보는 즐거움 이 있다. 한 걸음 나아가면 같은 영화라도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말투로 대화를 건넨다.

올해 칸과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개봉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페니키안 스킴>을 보니 문득 2년 전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가 떠올랐다. 76회 칸영화제에서 봤던 <애스터로이드 시티> 를 국내 개봉 이후에 다시 보며, 익숙하고 잘 알던 친구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한 기분에 사로 잡혔던 기억이 있다. 그때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같은 영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 냐에 따라 매번 새로운 만남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익숙한 만큼 더 농익는 재미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 거듭나는 경험들이 우리가 극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유일 것이다.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샛길로 나를 안내해줄지도 모른다. 독자 여러분도 시차를 두고 파도처럼 차례로 밀려오는 이 즐거움을 부디 만끽하길 바라며, 올해 공개된 칸의 영화들에 대한 짧은 소개를 글로 먼저 전한다.

덧. (섣부르지만) 올해 본 장르영화 중에 최고일것 같은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씨너스: 죄인들> 에 잊지 못할 장면이 나온다. 시간과 기억, 역사와 사건의 경계가 무너지는 교차점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만나는 환희의 순간.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서 빨리 칸의 영화들을 국내 극장에서 만날 수 있길 손모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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