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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의 클로징] 싱크홀

성장. 요즘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가장 강조하는 단어다. ‘성장하다’(Grow)의 어원 ‘Growan’은 ‘녹색’(Green)의 앵글로색슨어이기도 하다. 풀이 우거지는 풍경은 녹색의 탄생이자 성장의 원형이다. 성장은 땅에서 피어난 것이다. 녹색은 단단하면서도 잘 파이는 땅의 양가성에 뿌리를 내리며 성장한다. 경제의 성장도 한동안 그랬다. 건물과 도로도 땅의 미덕 위에 세워지고 깔렸다. 하지만 땅이 지탱할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생겼으니, 땅을 쳐부수는 실력을 날로 키우면서도 땅이 언제까지나 끄떡없을 것이라 믿고 넘어가는 인간이다. 성장은 조화로운 번영에서 벗어나 파괴로 치달았고, 괴롭고 지친 땅은 무너져내리고 있다.

싱크홀의 원인 1위는 상하수관 누수다. 최근 5년간 벌어진 지반침하 사고의 원인 중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서울 지역만 해도 하수관로 가운데 30%인 3300km가 50년을 넘겼다. 관로 100km를 정비하는 사업에 드는 비용이 약 2천억원이다. 수도 요금이 싸디싸고 조세 부담률이 높지 않은 한국 사회가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다. 그런데 그나마 상하수관 손상에 따른 싱크홀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깊이는 보통 1m 이내고, 주민 신고가 들어가면 신속히 복구된다. 우리가 만난 거대하고 강한 상대는 10m 이상 깊이의 대형 싱크홀과 그 원인인 지하공간 난개발이다. 개발을 자제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답이다. 그러나 쓰지 말아야 할 기술을 쓰고 써야 할 기술은 쓰지 않는 사회가 개발을 자제할 리가 없다. 최근 생겨난 대형 싱크홀 현장 부근에서 있었던 공사는 견고한 지반 구조를 활용하는 나틈(NATM) 공법으로 진행됐다. 수분을 머금은 연약한 지반층에서 발파작업으로 토사가 흘러내려갈 가능성만 키운 것이다. 심지어 정부는 싱크홀 위험 예측 기술인 ‘GSR’(Ground Subsiden Risk)을 개발해놓고도 활용하지 않았다. 공사 현장의 지반을 분석하여 인공지능으로 점수를 산출하고 등급을 분류하는 기술로, 시공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4개 등급의 사고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그동안 시범 도입조차 되지 않았다. 정부와 정치권은 상용화까지 갈 길이 먼 파이로프로세싱(사용후핵연료 건식 재처리)과 SMR(소형모듈원자로) 개발에 열을 올리고 돈을 붓고 장밋빛 물감을 짜내고 있지 않은가. 성장 만능주의에 땅이 꺼지는 사태 속에서도 성장에 매몰된 나라, 국내총생산(GDP)과 코스피 지수 사이로 정치마저 꺼지고 있는 나라, 선거 때마다 각종 지하 개발 공약이 판을 치는 나라에 대고 세 사람의 말을 빌려 일갈한다. “국민소득 추계로부터 한 나라의 후생을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GDP 개념의 창시자 사이먼 쿠즈네츠) “물건들이 깨지고 닳고 구식이 되고 폐기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국민총생산은 증대할 것이고, 국가회계상으로는 우리가 부유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하위시스템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팀 잭슨, <성장 없는 번영>)

아, 두 사람 더 있다. “노란불일 때 그냥 가는 스타일이라면서요!”(박동원 역 김성균) “이건 레드야. 서야 돼.”(정만수 역 차승원)(영화 <싱크홀> 중) 싱크홀은 노란불이 아니다. 빨간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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