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면, 괜히 심술이 난다. 스마트폰에 고개 박고 걷는 게 습관이 된 탓에 칙칙했던 뒷산이 어느새 옅은 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걸 뒤늦게 깨닫곤,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미세먼지로 매일 희뿌옇던 하늘이 어느 날, 쪽빛 물감을 뿌려놓은 듯 파랗게 개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일주일 내내 흐리다가 단 하루, 햇살 묻은 바람에서 뽀송한 솜이불의 감촉이 느껴질 땐 (약간의 과장을 보태) 살아 있어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온몸으로 퍼지는 이 감각에 굳이 이름을 붙여보고 싶어, 얇디얇은 내 어휘사전을 뒤적이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행복’이라고 쓴다. 그래서, 심술이 난다. 나는 파란 하늘 아래 초록 내음을 맡는 것만으로 이렇게 꽉 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데, 이놈의 세상이 나를 매일매일 강퍅한 인간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좀 살 만한가 싶어 방심하고 뉴스를 틀 때마다 환장할 소식에 속이 뒤집어진다. (오늘은 5월1일이다.) 행복을 표현할 기회와 방법이 매일매일 사라져간다.
요새 말문이 트인 인생 36개월차 딸아이는 내 표정이 굳어질 때마다 달려와 묻는다. “아빠, 기분이 안 좋아?” 그러곤 내 의견 따윈 궁금하지 않다는 듯 다그친다. “안돼애~, 행복해야지.” 이 조그맣고 사랑스럽고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에게, 행복은 어떤 색과 모양을 하고 있을까. 내가 행복의 정의와 형태에 대해 고민하며 구두쇠처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아낄 때, 딸아이는 걸음을 걷듯 당연하게 내뱉는다. “아! 행복해!”
뭐가 그리 좋을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지, 참 좋을 때다… 라고 속으로 꿍얼거리다가 문득 깨닫는다. 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느샌가 내가 행복에 젖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행복’이 결과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출발을 위한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치 의성어처럼 외쳤던 ‘행복’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닐 것이다. 어떤 의도나 지향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입 밖으로 해방된 행복은 손에 잡히는 실감으로 주변을 메아리친다. ‘일상 속 작은 것에 감사하며 행복을 발견하라’는 성인군자의 상투적인 교훈이 저 조그만 것의 팔딱임을 거쳐 기어이 내 것이 된다.
4월 한달 내내 <씨네21> 창간을 기념하여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한다고 했지만 모자란 것투성이였고, 주변에서 크고 작은 지적과 섭섭한 토로를 들었다. 웬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쉬움을 지적하는 의견 하나하나에 이토록 뼈아픈 건 그만큼 조언을 건네는 쪽과 받는 쪽 모두 진심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본래 100개의 칭찬보다 1개의 비판이 더 묵직하게 오래 남는 법이다. 다소 의기소침한 한달을 보낸 끝에 마침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창간 기획에 다다랐다. 독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달, 아니 1년, 아니 30년을 다시 되돌아본다. 더 나아질 거라고 다짐해보지만 여전히 확신은 들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이 다시 보고 싶은 코너로 뽑아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읽고 있자니, 새삼 벅찬 감회가 차오른다. 어쩌면, 감히, 행복하다. 5월엔 이 낯간지러운 단어를 좀더 자주 입에 올려보려 한다. 앞으로 1년. 또 1년. 다음을 향한 출발의 신호가 되길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