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소스타인 베블런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이다. 그런데 이 두 천재가 21세기 인류의 경제생활에 대해 완전히 엇갈리는 예견을 내놓은 지점이 있다. 여가와 소비 중 과연 어느 쪽이 늘어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생산력 증대에 착목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손자손녀 세대인 21세기가 되면 노동시간이 하루 서너 시간으로 단축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인류는 이제 먹고살기 위한 필요에서 해방돼 펑펑 남아도는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최고의 고민거리로 여기며 살아갈 것이라고 보았다. 최근의 경제학자들의 논평에 따르면 케인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증대는 대략 예측한 대로 들어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대다수의 근로 대중에게 있어 하루의 노동시간이 서너 시간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 견주어볼 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어째서 이런 괴리가 발생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베블런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베블런에 따르면 사람들의 소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식주와 같이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소비, 그리고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지키기 위한 ‘품위 유지’ 성격의 과시적소비. 민주주의와 산업사회가 자리 잡은 현대에서는 최정상의 부자부터 시작하여 중하류층의 서민들까지 모두 좀더 ‘있어 보이기’ 위한 소비에 골몰하는 ‘경쟁적 모방(emulation)’의 행태를 보인다고 했다. ‘지영이 백’이나 ‘노페 점퍼’는 부유층의 전유물이기는커녕 (짝퉁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전 국민의 패션으로 대중화되어 있다. 그래서 베블런은 기술혁신이 근로 시간의 단축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생산력이 증대되고 풍요의 시대가 도래하여 모두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세상이 온다면 이는 이제 ‘과시적소비’의 품목으로서는 매력을 잃게 될 것이며(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TV, 냉장고, 심지어 ‘스팸’이 부의 상징이었음을 기억해보라), 없는 소비 품목을 새로 개발이라도 해서 자신을 남들과 차별 짓고자 하는 소비 욕구가 폭발할 것이다. 이에 따라 생산력이 아무리 증대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소비에서 ‘과시적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끝없이 늘어날 것이며, 사람들은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 소득을 올려서 그 ‘과시적소비’의 품목을 손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습격은 생산기술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것이며 이로 인해 인류의 경제생활은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풍요의 시대로 들어설 것이라는 낙관론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하지만 어떤 ‘풍요’인가? 케인스가 예견했던(그리고 갈망했던) 대로 모든 사람들이 힘든 노동에서 풀려나 여가를 만끽하는 풍요인가? 아니면 베블런이 추측했던 대로 사람들이 더 빛나고 더 ‘있어 보이는’ 품목들을 손에 넣기 위해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하려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풍요인가? 미래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중 어느 쪽으로 가게 될지는 이 지점에서 결정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