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김수민의 클로징] 명당
김수민 2024-11-07

“사고 당일 관할 내 대규모 집회·시위가 예정돼 있어 용산구의 치안을 책임지는 용산경찰서로서는 집회·시위 대비와 핼러윈데이의 질서유지를 모두 담당하게 됨으로써 경력을 실효적으로 운용하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에게 내려진 1심 판결문의 내용 일부다. 대통령실 이전이 이태원 참사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사법부가 공식 인정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3월 당선되자마자 대통령실 이전을 추진했고 기어이 용산에서 취임을 맞았다. 늘어날 집회에 맞춰 경찰 인력을 증원하고 재배치할 시간이 없었다.

대통령실 이전은 윤석열 정부의 실패를 확정 지은 사건이다. 윤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 청산’을 내걸고 제왕적 방식으로 대통령실을 이전했다. 비용 집행은 예비비로 이뤄졌다. 예비비는 예산 편성 과정에서 예상할 수 없는 지출에 대비한 것이다. 대통령실 이전은 신규 정책 사업으로서 예산 편성 과정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추가경정예산도 법령 개정도 없이 추진한 것은 국회를 건너뛰기 위한 수작이다. 제대로 된 대통령이라면 최종 결정은 국회에 맡겨 권한과 책임을 모두 나누고, 야당을 설득하는 게 여의찮으면 국민에게 호소한다. 토론하는 사이 공무원들도 변화를 대비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라는 핑계를 댔지만, 들어가서 본인이 손수 문을 닫고 나오는 게 훌륭한 정치인이다.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자만이 새 시대의 맏이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길을 따라 흐른다”라고 할 때, 그 ‘길’은 ‘Road’에 앞서 ‘Way’를 의미한다. 정치에서 명당과 흉지는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관계와 구조 속에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청와대의 풍수지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이 국회와 정당을 무시하고, 비서 조직에 불과한 대통령실이 내각과 행정 각부 위에 군림하면서 들어선 것이다. 그 꼭짓점에서는 대통령이나 그 최측근과 직통하는 비선이 발호하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것이 윤 정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대통령실 이전은 “방만 바꾸어버렸다”(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지배하되 책임지지 않는 대통령실의 경향은 더 강화되었다. 용산의 첫 대통령은 기자회견에 인색했던 종로의 마지막 두 대통령보다도 더 언론을 피한다.

이 글이 인쇄되고 있을 11월1일 ‘고발 사주 의혹’ 손준성 검사에게 2심 선고가 내려진다. 1심처럼 유죄라면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의 소행을 정말 당시 검찰총장이 몰랐는지, 윤 대통령은 왜 “검사 관여가 드러나면 사과하겠다”라는 약속을 어겼는지, 법무부가 손 검사를 징계하지 않고 승진시킨 이유는 무엇인지 의혹은 굳어질 것이다. 무죄일 경우는 일이 더 커진다. 윤석열·김건희·한동훈 3인을 비호하는 미접수 고발장과 민감 정보가 담긴 판결문을, 손준성이 (검찰 바깥으로 흘린 것이 아니라) 윗선에 보고용으로 올렸을 가능성이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윤석열 당시 총장이 유출자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는 대선후보 시절 고발 사주의 증거를 ‘괴문서’라 불렀고 제보자가 사주를 받았다고 역공했다. 결백한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고 이것만으로 대통령 자격을 상실했다. 떳떳하지 못한 자가 숨어들어간 곳은 그곳이 어디든 흉지다. 의식은 공간을 지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