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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부산 밤바다, 그 날씨에 담긴 BIFF의 추억. 그리고 새로운 기억
송경원 2024-10-11

기억은 종이에 쓴 기록처럼 ‘정보’의 속성을 지닌 반면 추억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새겨진 가 아닐까 싶다. 이제 10월 초의 부산은 예전만큼 쌀쌀하지 않흔적을 더듬는 ‘감각’에 가깝다. 내 경우엔 가을바람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조건반사처럼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가 생각난다.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으론 부족하다. 얇은 겉옷 사이로 바람이 뚫고 들어와, ‘겨울옷을 꺼내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부산영화제와 관련해 잊히지 않는 경험, 몸에 새겨진 기억 중 하나는 대형 스크린이 마련된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덜덜 떨어가며 봤던 야외 상영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봐야 하나 싶었지만 막상 영화가 끝난 후, 더할 나위 없는 충만감으로 가득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목을 밝히기 곤란한) 그때 그 영화를 얼마 전 우연히 다시 보았는데 너무 엉망이고 재미가 없어 깜짝 놀랐다. 그 시절의 나는 무엇에 그렇게 취하고 반했던 걸까.

영화는 인연이다. 영화제에서 종종 GV 진행을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 멘트를 서두에 꺼낸다. 엉망진창이었던 그때 그 야외 상영작은 영화를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 (나만의) 추억이다. (제목을 말할 수 없는) 그 영화를 두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화라 추천할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내겐 언제까지나 기분 좋은 만남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날의 날씨, 관객들의 분위기, 나의 기분이 마치 한장의 사진처럼 찍혀 유일한 추억이 되는 과정. 나중에 개봉하면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보러, 구태여 시간과 돈을 들여 영화제까지 가는 건 어쩌면 그 유일무이한 만남의 두근거림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이제 10월 초의 부산은 예전만큼 쌀쌀하지 않다. 바닷가 옆에 붙은 요트경기장이 아니라 멋들어진 영화의전당 야외무대 덕분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29주년을 맞이한 부산영화제를 둘러보며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 중이다. 남포동에서 해운대로, 다시 영화의전당으로 주무대를 옮겨가는 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이젠 극장을 벗어나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부산 밤바다를 볼 일이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 정도) 옛날 사람인 나는 달라진 모습들을 보며 조건반사처럼 추억을 곱씹는다. 물론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아쉽다’는 단순 비교를 하려는 건 아니다. 만약 올해 처음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이가 있다면 그분에게는 올해의 경험이 유일무이한 부산의 기억으로 뿌리내릴 테니까.

넷플릭스 영화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올해 부산영화제의 선택을 두고 변화를 우려하는 기사들이 적지 않게 쏟아졌다. 몇해 전부터 새로운 콘텐츠 발표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부산영화제인 만큼 OTT 작품과 비중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OTT로의 쏠림이라기보단 시대에 맞춘 확장이라 불러 마땅하다. 한국 독립영화의 발굴, 지지부터 난해한 예술영화의 과감한 소개까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보면 여전히 부산영화제만이 줄 수 있는 경험들을 제공하고 있음을 금방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정을 가지고) 직접 겪어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직 숨겨진, 여전히 빛나는, 유일무이한 추억의 씨앗들은 올해도 영화제 곳곳에는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