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언어의 거울에는 종종 속내가 거꾸로 투영된다. 소리 높여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대체로 불의에 길들여 있고, 애국과 전쟁을 말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치는 법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9월26일 화상 기자회견에서 “1편의 반응이 2편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의식해서 만들진 않았다”고 말할 때부터 어딘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커: 폴리 아 되>는 전작 <조커>를 둘러싼 부정적 평가와 우려에 대한 화답 같은 영화였다.
자기반성은 대체로 건강함의 증거지만 창작의 영역에선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속편이니까 전작에서 이어지는 답변을 내어놓는 게 당연하지만 뭐든 과하면 곤란하다. 걱정 가득한 반성문은 (전작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이들의) 눈치를 보다 길을 잃은 건지 점점 수다스러워지더니 어느새 (보편타당하고 안전한) 올바름에 안착해 (지적)각성을 강요한다. 그렇게 카메라 초점이 아서에 맞춰지는 순간 조커가 지워지고 (납득 가능한 일반인으로서) 아서가 회복된다. 합리적인 서사의 완성. 차라리 이것이 한편의 영화였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같은 망상을 공유하며 두배의 광기를 노렸던 ‘폴리 아 되’는 온데간데없고, 조커의 탄생을 그린 1편의 광기를 배반한 2편은 아서를 위한 반성문을 써내려간다. 섞이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섞어가며.
나도 반성을 보태자면 <조커>를 좀더 칭찬해줄걸 그랬다. <조커>를 보고 ‘조커의 매력이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의 위력’이라고 정리했었는데, 그 말은 <조커: 폴리 아 되>를 위해 아껴두었어야 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다른 ‘조커’ 영화들 대신 <보 이즈 어프레이즈>(2023)가 연상되는 정신분석 게임이다. 중심에는 캐릭터 조커의 재해석이 아니라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위대함이 자리한다. 법정물, 뮤지컬, 사이코드라마 등 여러 요소를 퍼레이드처럼 삽입해도 끝내 어수선한 나열에 그치는 건 이 영화의 어떤 요소도 대배우 호아킨 피닉스 앞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까놓고 말해 스토리부터 연출까지 이 영화의 모든 요소는 ‘호아킨 피닉스라는 존재’에 휘둘린 끝에 잡아먹혔다.
전작을 뛰어넘는 속편은 이토록 힘든 일이다. 대체로 속편은 전작을 의식하다 자신의 색을 잃기 십상이다. 문득 <조커: 폴리 아 되>와 <베테랑2>가 겹쳐 보인다. 의미 있는 이야기, 윤리적이고 합당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타당하다. 하지만 나는 때로 영화가 설명되지 않을, 설명을 거절하는 광기의 영역으로 남길 바란다. 은밀한 욕망의 거울을 들어 올해 나온 속편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베테랑2> <조커: 폴리 아 되>를 비춰보며 공통적으로 느낀 아쉬움을 곱씹어본다. 의미가 재미를 집어삼킬 때, 영화가 나에게 설명을 시작할 때 날카로운 이성은 깨어나지만 캐릭터와 한몸되어 공명했던 심장은 점점 식어간다. 지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