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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클로징] 상실의 시대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정준희 2024-09-26

바야흐로 한가위다. 두 단어로만 이뤄진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내 연식과 문화적 배경이 드러날 테다. ‘바야흐로’라는, 시의적절한 뉘앙스에 발음마저 유려한 이 단어는 구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문어체로도 잘 쓰이지 않는다. 한가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여름을 끝내고 가을걷이에 들어간 시절의 풍요와 여유가 배어 있는 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진정성 있게 사용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전통의 고아함을 품지 못하면서도 그 무렵이면 늘 그런 표현을 별 생각 없이 가져다 쓰는,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의 게으른 관습 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더 진부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 피하게 되는 악순환이다.

말이란 시대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라는 말이 제아무리 예쁘고 여전히 대체할 수 없는 적확한 표현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 시대 언중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결국 쓸쓸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가위’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더이상 농촌 기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그 업을 중심으로 촘촘히 연결돼 있던 소규모 인간 네트워크에 의탁하던 삶과는 꽤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올해는 아직도 너무나 더워서, 도무지 가을로 가는 길목이 열리지 않는 분위기다.

적어도 내게 이번 추석은, 그래서, ‘남들이 쉬는 날’ 이상의 그 어떤 정서도 환기시키지 못한다. 요컨대 내게는 며칠 푹 쉴 수 있을 ‘연휴’로서의 의미조차 아니라는 뜻이다. 공휴일과 무관하게 살아온 지 벌써 여러 해. 내게 이 추석이란, 남들이 쉬는 만큼 내가 당장 응대할 일이 줄어드는 때인 한편, 그 쉬는 남들을 고려하여 해야 할 일이 더해지는 기간에 불과해졌다.

의미 있어야 할 날들이 역설적으로 더 의미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나의 개인적인 사연을 넘어, 현대에 만연하게 된 ‘공허함’의 일부인 것만은 분명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빽빽하게 의미가 들어차 있었다. 지붕에도, 처마에도, 장독대에도, 우물에도. 그에 걸맞은 신이 살거나, 오랜 세월의 사연이 배어 있거나, 다양한 상징을 붙여두곤 했다. 해는 ‘햇님’이었고 달은 ‘달님’이었다. 그 달엔 토끼가 살았고, 심지어 이 녀석들은 사람마냥 절구질까지 했다. 차례상에는 조상님이 드실 음식이 놓였다. 자손들은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붓을 눌러 축문을 썼고, 그걸 운율 있는 곡조로 노래했다.

세상의 크기는 그때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그 커진 세상 속 것들과의 접촉을 위해 전처럼 두툼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의미가 사라진 곳을 채운 건 ‘기능’이다. 나는 그(것)에게 또 그(것)는 나에게 특정한 기능이라는 의미 아닌 의미로서만 관계를 맺는다.

나도 적잖이 나이가 들어버린 만큼, ‘좋았던 시절(花樣年華)’을 쓸쓸히 읊조리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쉬워하는 상실은 막연한 과거인 것만 같지는 않다. 지금 시대는 지금 시대의 방식으로 사는 게 맞다. 그러나 그 시대가 반드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를 거세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래서 아쉽고 또 슬픈 것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것에 우리만의 상징과 은유를 더하는 방식으로는 왜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일까? 한편에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조직된 ‘콘텐츠’가 많다 못해 실로 넘쳐나는데, 정작 왜 우리 삶은 이렇게 무의미한 공간과 시간으로서 공허히 탈색되어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