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인가?” 기사에 적힌 그의 나이가 낯설다.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 지회장. 2015년 아사히글라스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원청은 하청 기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서울에 직장이 잡히면서 내가 구미를 떠나던 무렵이다. 이후 그는 내 머릿속에서 옛날 그 나이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최근 대법원은 원청이 해고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9년 투쟁 끝에 그들은 원청 정규직으로 복귀했다.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태 당시 바로 옆 공장 아사히글라스는 작업을 강행했다. 차헌호는 이를 세상에 알린 제보자였지만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노동자는 서너명이었다. 그 공장은 불량품을 만든 노동자에게 빨간 징벌 조끼를 입히는 곳이었고, 구미 4공단은 민주노조의 불모지였다. 소수 인원으로 노출되면 노조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반면 당시 지방의원이던 나의 활동은 노골적이었다. 집회에서 때로는 노조 간부보다 더한 강경 발언을 해 지역 재계의 눈총을 받았고, 공공부문 투쟁에선 감사와 조례 개정안으로 사측을 헤집었다. 나는 그러나 자신이 초짜라는 점과 내 운동이 경계인의 운동임을 유념했다. 차헌호 같은 노동자들 앞에서.
임기 종료 직전 가까운 의원들과 술자리를 가진 날이었다. 나를 포함한 재선 실패자들을 위로하던 한 재선 실패자가 눈물 흘리며 차에 오를 때, 차헌호가 대리운전 기사로 나타났다. 임금은 최저 수준이고 노조 결성은 기약할 수 없던 나날에 그는 겹벌이를 뛰고 있었다. 새삼 괴리감이나 부끄러움을 갖지는 않았다. 연대 경험이 쌓일수록 해당 현장과 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차이도 같이 절감해온 터였다. 다만 미안함까지 없진 않았다. 노동운동을 거들어온 그 일말의 권력조차 더는 쓸 수 없게 됐으니까. 이튿날 나는 결심했다. ‘곁에서 도움이 안된다면, 빈 곳으로 치고 달리자.’ 노동 상담을 시작했다. ‘노조 설립 지원’은 언감생심이었다. 최저임금이나 해고수당 또는 근로계약서를 받지 못한 노동자 개개인을 만났다. 겨우 1년이었지만 활동가로서 가장 보람 있던 시절이었다.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그 1년이 지나 노동자 178명이 드디어 노조 깃발을 들어 올렸다.
그들의 복직 소식에 오늘 나의 현장을 돌아본다. 정치권에서 노동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시사 방송은 그런 현실을 뒤따른다. 하지만 비상 대기하는 일도 가치가 있다. 내게 온 마이크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지난 1월 하순, 한 TV 프로의 마지막 주제는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이었다. 사고 기업들의 기소율과 형량이 낮아서 문제라고 내가 지적했는데도, 상대 패널은 종료 직전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기업들이 재판받다 줄폐업할 것”이라며 급습을 했다. 나는 한번 더 중대재해처벌법이 주제로 올라온 그다음주 방송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사이 또 일어난 소규모 사업장 사망 사건들을 언급했다. “이게 현실이다.”
주제를 내가 선정하는 라디오 코너가 있다. 얼마 전 아사히글라스 투쟁의 역사와 노동자 승소의 의미를 다뤘다. 사용자측이 여전히 노조에 적대적이며 근래 희망퇴직자 모집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알렸다. 노동자들은 곧 새로운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노동운동도 계속된다. 죽고 다치고 쫓겨나는 노동자들의 세계, 산재와 실업보다 자본의 불안을 먼저 걱정하는 세계, 두 세계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