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 우울할 때 더 우울함으로 파고들어 바닥을 찍은 후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인 나는, 요즘처럼 현실이 버거울 땐 암울한 다크 판타지의 결정체 <베르세르크>를 종종 꺼내 본다. 여기 시궁창 같은 마을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가 있다. 소녀는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동화처럼 요정과 광전사가 나타난다. 실종되었던 동네 언니가 요정이 되어 나타나자 소녀는 자신을 구원해줄 탈출구라 여기고 쉽게 따라나선다. 하지만 언니는 실은 요정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고, 이때 주인공인 광전사 가츠가 난입하여 괴물을 사냥한다. 그러자 소녀는 이번엔 가츠에게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광전사를 둘러싼 세계 역시 괴물들과 영원한 싸움을 이어가는, 끔찍한 지옥이다. 갈피를 잃은 소녀에게 가츠는 냉혹하게 내뱉는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종종 말의 앞뒤를 잘라 본래 의도와 달리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명대사가 딱 그렇게 왜곡하기 좋은 먹잇감이다. <베르세르크>를 관통하는 이 대사는 언뜻 현실로부터 달아나려는 이들의 나약함을 질타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로 소녀가 자기 발로 설 수 있게 등짝을 후려쳐 깨우는, 매콤한 응원에 가깝다. 지옥에서 달아나는 건 잘못이 아니다. 달아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그 길이 온전한 본인의 의지인지가 중요하다. 버티느냐, 달아나느냐 양자택일 문제로 접근하는 순간 헤어날 수 없는 늪이 펼쳐진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당신의 선택은 온전히 ‘독립’된 자신의 판단인가. 당신은 지금 홀로 서 있는가. 노력하여 운명을 개척하려는 이라면 그 답이 설사 탈출이라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다른 것에 예속되거나 의존하지 않는 존재가 내딛는 걸음은 도망이 아니라 도전과 모험이다.
2024년, 헬조선의 지옥불은 점점 가열차게 타오르는 중이다. 탈출하느냐 버티느냐를 두고 고민하던 목소리가 엊그제 같은데,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는 세상은 양자택일을 고민할 시간조차 앗아가버린다. 탈출도 늦었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이제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한다. 한창 유행 중인 러키비키 원영적 사고나 쇼펜하우어의 생존형 비관주의는 방향이 다를 뿐, 모두 암담한 현실을 버티고 숨 쉴 방법에 대한 답변처럼 보인다. 지난 3년을 돌이켜보건대 세상이 점점 나아질 거라는 건,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는 건 나태한 착각에 불과했다. 현실이 지옥이라고, 낙담하고 손을 놓는 순간 세상은 순식간에 망가진다. 몇년간 그 과정을 목격하고서 이제야 깨닫는다. 현실이 지옥이라면, 아니 지옥일수록 뭐라도 해야 한다. 타인에게 결정과 사고를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낙원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절망적인 현실일수록 스스로 두발로 서야 한다. 독립해야 한다.
광복절을 앞두고 암울함의 끝판인 <베르세르크>를 펼쳐 든다. 다시 한번 가츠의 대사를 빌리자면, “기도하지 마. 기도를 하면 손이 놀잖아. 네가 쥐고 있는 그건(횃불) 뭐야!” 문득 횃불을 들어 주변을 비춰본다. 싫어할 건 한국이 아니다. 한국의 ‘어떤’ 부분이다. 대상을 뭉뚱그리지 않기 위해, 제대로 세밀하게 구분하기 위해 횃불을 높이 들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