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다. 카를 마르크스 하면 ‘자본주의의 붕괴’다. 소스타인 베블런 하면 ‘과시적 소비’다. 하지만 <국부론>에는 ‘보이지 않는 손’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자본론>에는 ‘자본주의의 붕괴’ 이야기가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한계급론>에서 정말로 중요한 개념은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모방적 소비’다.
‘과시적 소비’의 아이디어는 꽤 널리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 피지배계급과는 다른 종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실제 생활에는 전혀 쓸데가 없는 품목에 엄청난 돈을 지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품목들– 예를 들어 1억원짜리 ‘만수르 세트’- 에 물 쓰듯 돈을 쓰는 소비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조금 험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돈지랄’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유한계급론>을 절반, 아니 그 이하만 이해했을 뿐이다. 베블런이 오히려 더욱 심각한 문제로 본 것은 중상류층 이하의 ‘모방적 소비’였다. 애초에 ‘과시적 소비’가 ‘우리는 너희와는 다른 종자’임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는 필연적으로 그 ‘너희’에게 불만과 소외감을 일으킨다. 그런데 여기에서 ‘너희’는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과도한 부의 집중이나 이 퇴행적 소비문화를 공격하는 대신, 그 ‘돈지랄’을 모방하는 방식을 택한다. 물론 쓸 수 있는 돈의 규모는 훨씬 적으니, 지배층의 진짜 ‘과시적 소비’를 흉내는 내지만 돈이 훨씬 덜 드는 방법들에 집중된다. 1억원짜리 ‘만수르 세트’ 대신 1천만원짜리 ‘천수르 세트’를 소비하는 식이다. (여전히 ‘돈지랄’이다!) 그다음에는 이러한 모방적 소비가 그 아래의 계급으로 파도치듯 전달된다.
잉어가 뛰면 망둥이도 뛰고 그 뒤를 이어 목침도 뛰며, 이를 보고 짜증이 난 잉어는 다시 더 높이 뛴다. 무한반복. 이러한 ‘모방적 소비’의 북새통 속에서 사회 전체, 아니 인류 전체의 소비 욕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이는 무한한 경제성장에 대한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인류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기후 위기를 위시한 각종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이 된다.
현재의 인류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이 되는 것은 1%의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20%, 아니 그 이상의 ‘모방적 소비’다. 세상에는 별쭝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돈지랄’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저런 사람들이 있나보다’라고 보아 넘기고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나의 ‘좋은 삶’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반드시 조달해야 한다. 하지만 ‘모방적 소비’의 물결에 휩쓸려봐야 망둥이가 되고 목침이 되어 정작 잉어의 경멸을 받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몸과 지갑과 정신이 축나고 황폐해질 뿐이다. 베블런은 무려 120년 전에 21세기의 인류에게 닥칠 가장 큰 재앙의 하나가 바로 이 사회 전체에 팽배한 소비주의의 물결이 될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 120년 동안 인류의 정신은 거의 진화하지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