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가 달라도 축제는 대개 비슷한 구석이 있다. 올해 크게 흥행했다는 2024 서울국제도서전을 다녀왔다. 몇해째 꾸준히 불황과 침체를 겪고 있는 출판 시장의 얼어붙은 분위기는 딴 세상 이야기다. 지난해보다 2만명이 늘어난, 무려 15만명이 방문했다는 숫자만으론 설명하기 힘든 어떤 기운이 행사장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양손 가득 굿즈를 들고 가는 사람, 사인이 담긴 한권의 책을 보물인 양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사람, 작가 강연을 들으려 기꺼이 긴 대기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문득 묘하게 영화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즐길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과표집된 공간은 외부와 격리된 채 이상한 열기로 들끓는다. 올해 도서전 테마이기도 했던 <걸리버 여행기> 속 이상향 ‘후이늠’처럼.
때때로 축제는 확인의 장소다. 당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공감해줄 사람들이 아직 이만큼이나 남아 있다는 생존 신고라고 해도 좋겠다. 바깥 시장이 얼어붙을수록 낙원을 찾아 모인 사람들의 열망은 더 뜨겁고 간절하게 달아오른다. 마치 얼음마저 녹여버릴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걸리버 여행기> 속 완벽한 세계 후이늠에는 이면이 있다. 좁아터진 이상향은 불완전한 것들을 바깥으로 밀어냄으로써 완벽을 유지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축제 역시 높은 벽을 쌓아올린 배척의 장소이기도 하다. 기꺼이 그 벽을 넘어올 에너지와 수고를 감수할 이들에게 허락된, 만들어진 낙원. 모여 있기에 실감했던 온기들이 흩어지고 나면, 다시 겨울이다.
도서전이 끝난 후 적지 않은 기사에서 출판 시장의 침체와 도서전의 열기 사이 괴리를 언급 중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계속될 겨울을 어떻게 버틸지 걱정하는 글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린다. 고민과 해법의 순서마저 어딘가 영화제를 둘러싼 담론과 닮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몇 차례 축제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론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책이 또는 영화가 세상의 주류가 아닌들 어떤가. 숫자는 세상을 해명하고 큰 그림을 그려주는 좋은 도구지만 때론 가까이 있는 것들을 가리기도 한다. (누군가 한정적이라고 말하는) 축제를 통해 내가 실감하는 건 여전히 책을, 영화를, 무언가를 사랑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심지어 근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거다. 여기 (작고 왜소한 내가 미처 소화하기 힘들 만큼 방대한) 실체가 있다.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다면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즐기고 공감하는 이들이 적어진다고 내가 느끼는 행복의 양이 줄어드는 것 같진 않다. 책의 매력과 영화의 생명력은 사실 망원경보다는 현미경에 가깝다. 한 사람이 온전히 실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복은 펜과 카메라의 힘을 빌려 다양한 형태로 태어난다. 도서전을 나서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내 손에 닿는 곳에 있는 반짝이는 순간들을 흘리지 않고 고이 주워 담아 보리라 다짐했다. 그 다짐의 열기가 식기 전에, 지금 이 순간에도 반짝이는 글을 빚어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을 모아 소개한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영화 속 한마디. “글을 쓰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살다가 글을 쓰게 된 거란다. 글이라도 써야 살아 있는 거 같아서.”(<베티 블루>(1986)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