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해설가에게 “선수로 뛸 거냐?”라고 묻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정치평론가는 “정치 안 하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지방의원 출신 정치평론가로서 나는 “뭐 하러 그 짓을 또 합니까?”라고 답한다. 물론 평론가로 사는 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올해도 그렇다. 비민주적인 진행자 교체에 항의해 한 프로그램을 떠나기도 했다.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위원 몇몇은 나를 모략하며 특정 정당 출신이라는 허위 사실을 씌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정치하는 것보다는 편하다.
의원은 신기한 직업이었다. 의회에서 관료나 다른 정치인과 치열하게 다투는 일, 길거리나 행사장에서 행인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일을 모두 한다. ‘싸우는 감정노동자’랄까. 평론가는 (조회수나 후원에 신경을 끈다면) 화면과 지면에서 할 말 하고 내려오면 그만이다. 정치인은 늘 표와 역학을 의식해야 한다. 당선하는 정치인은 소수고, 임기 끝나면 또 선거다. 돈은 돈대로 깨진다. 공공선에 복무하는 이타심으로 이 모든 것을 견디는 정치인은 제법 많지만, 세상은 알아주지 않는다.
정치는 끝난 뒤 돌아보면 더 허무하다. 내가 구현한 여러 정책이 퇴임하고 나서 허물어졌다. 비정규직 권리 조례는 한동안 사문화됐고 구미독립영화제는 없어졌다. 남은 업적들도 있지만 튼튼히 버티고 있다는 것은 내가 없어도 세워졌을 것임을 의미한다. 결국 정치인 시절 내가 해낸 것은 두 가지다. 누가 해도 됐을 것과 나 하나 빠지면 무너지는 것. 지금까지 이런 쓰디쓴 맛은 없었다. 정치는 직업인가 허업(虛業)인가. 요즘엔 현직 지방의원이면서도 거대 비리 혐의자의 변호인이나 ‘프로 고발러’로서 더 유명한 자들도 있던데, 그들의 처세와 요령을 부러워해야 하나.
공직을 그만둔 지 딱 10년이 되었다. 이따금 정치 지망생을 만나면 가급적 선거 도전을 늦추고 다른 전문 분야에서 생계를 꾸리라고 권한다. 내 지난날을 후회해서도 아니고 그의 정치력을 무시해서도 아니다. 그동안 정치가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2010년대 초반의 정책 캠페인과 풀뿌리 운동은 지금보다 꽤 활발했다. 시민들은 나눔과 배움에 우선순위를 뒀고, 복지국가와 경제민주주의의 길은 부도덕한 정권을 뚫어냈다. 그러나 어느새 이웃과 연대하며 손수 의제를 만드는 활동은 사그라들었다. 정치판은 훌리건이 장악했고 다원주의와 통합적 비전은 쓰러졌다. 심상정과 박용진이 지워진 국회는 그 단적인 귀결이다.
한국은 정치 테러의 나라는 아니다. ‘멕시코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 선거 후보.’(<뉴욕타임스> 기사 헤드라인) 동시선거를 맞아 38명의 후보가 범죄 조직에 피살됐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 목숨을 잃은 전세계 환경운동가는 1700여명. 한국에선 지난 1월 두명의 국회의원이 습격당했으나 대다수 시민은 이를 규탄하고 쾌유를 빌었다. 그들의 재선이 빚은 재발 방지 효과도 만만치 않다. 다만, 부끄러운 것이 있다. 지구 곳곳의 활동가들이 여느 시민보다 앞서 사선에 노출되는 동안, 한국의 유력 정치인들은 자기 리스크에 지지자를 동원하고 시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죽을 걱정이 없는 정치인은 그 여유와 행운을, 시민들이 죽고 다치는 현장으로 뛰어드는 데 쓰시라. 정치인은 남의 삶과 죽음이 자기 일인 직업이다. 나를 포함한 언론인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