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 대해서 펀(Fun)하고 쿨(Cool)하고 섹시(Sexy)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게 어떤 대처입니까?”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네요.” 소위 ‘펀쿨섹좌’로 불리며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은 일본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의 어록은 주장을 근거로 삼는 일종의 순환논법에 가깝다. 이를테면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약속이니까”라는 식인데, 표정과 말투를 더해 그럴듯하게 포장해봐도 결국 알맹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공허한 말들을 이 정도로 투명하고 뻔뻔하게 내뱉으니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지경을 넘어, 하나의 놀이에 이르렀다. 펀쿨섹좌가 유별나긴 하지만 실은 약속의 내용물을 채우지 않는다는 건 정치 언어의 근본적인 속성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정치인만큼 쓸모없는 이야기꾼도 없다. 펀쿨섹좌를 향한 비웃음이 이내 씁쓸함으로 되돌아오는 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부류의 정치인들이 우리에게도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사람보다 더 혐오스러운 이들은 거짓도 진실도 피해가는 자들이다. 정치인들은 책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당연한 걸 당연하게 말한다. 그렇게 ‘쌀로 밥을 짓는’ 정치인들의 당연한 이야기는 사람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주범 중 하나다. 그들의 말은 의미도 재미도 없다. 이야기꾼에서 가장 거리가 먼 직업 중 하나가 정치인일 테지만, 역설적으로(어쩌면 당연하게도) 성공한 정치인들은 반드시 좋은 이야기꾼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김신욱 라디오 PD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이 모이는 이야기는 ‘아는 사람의 모르는 이야기’다.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뒤늦게 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일화가 적지 않은 울림을 안겼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한 말 중에 제일 아름다웠던 말은?’이란 질문에 바이든은 “1972년 12월18일이었죠…”라고 운을 뗀다. 당시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바이든은 살아남은 두 아들과 함께 슬픔을 견디고 있었다. 어느 날 시골길을 운전하던 중 소 한 마리가 울타리를 뛰어넘어왔고, 놀란 아들이 바이든을 확인한 뒤 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아빠, 온 세상보다 아빠를 더 사랑해요.” 바이든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때를 회상한다. “아들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자기 곁을 지킬 거라는 걸 말이에요.”
중요한 건 말 그 자체가 아니라 스토리다. 앞뒤 정황과 맥락이 결국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번주 <씨네21>에서는 22대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을 만났다.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중인 영화산업은 ‘산업’이란 미명하에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문화예술이며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한 대상이다. 정부가 손을 놓은 지금, 국회는 어떤 대안을 모색 중인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또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식이 멸종되고 있는 2024년의 대한민국, 우리에겐 이런 당연해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들이 더 필요하다. 언젠가 이 빤한 이야기들이 의미로 이어져 변화의 불씨가 될 수 있도록. 다시금 상식이 상식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