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기적이고 근본적인 기술혁신이 벌어져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우리의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공포가 확산된다. 이에 대한 경제학 교과서의 표준적인 대답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에 가깝다. 새로운 기술이 확산되면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므로 그쪽으로 노동력이 이동하면서 생산성은 계속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낙관주의의 논리에 별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주장에서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시기마다 나타났던 상이한 기술적 혁신들의 상이한 특성들, 그리고 그것들이 긴 시간 동안 진화해온 패턴 등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기술혁신’이라고 다 똑같은 성격의 것도 아니며,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노동력, 즉 사람의 대체’도 항상 똑같은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중반 이후 현재까지의 기술혁신은 개인적 집단적 차원의 인간의 노동능력을 하나씩 하나씩 기계가 빼앗아가면서 무력화시켜왔던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먼저 18세기에 도입된 방직기/방적기와 증기기관 동력은 인간의 손끝과 팔다리에 담겨 있었던 ‘숙련’과 인간 집단 전체가 뭉쳐서 발휘하는 집단적인 물리적 에너지를 빼앗아갔다. 19세기 말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대기업이라는 생산조직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간들의 집단적인 협력과 협업의 생산성을 전유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산업혁명의 진전은 생산자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하나씩 무력화시켰으며, 그때마다 근로대중은 이 ‘파괴적 혁신’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모시켜야만 했다.
가까운 과거를 보자. 1980년대 제조업에 자동화가 대폭 도입되자, 이제 ‘육체노동’에서는 부가가치와 생산성이 나올 수 없다는 논리가 횡행했다. 그래서 1990년대에 들어오면 전세계의 모든 정부와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노동대중이 ‘지식노동자’로 변모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창한다. 이제 기계 앞에서 남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란 정신노동뿐이니, 사람들에게 대학 진학을 장려하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 처리 능력을 함양시키고, 가능하다면 창의성까지 발휘하는 ‘인적자본’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미래적인 산업정책의 기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 인공지능의 충격이 우리를 강타했다. 이제 정신노동을 포함한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이 기계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그에 비해 인간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다. 이제 기계로 대체하지 못할 인간의 능력은 어떤 영역이 남아 있을까? 욕망과 소비? 이것도 의문이다. 지금 방송, 광고, SNS가 대중의 욕망을 어떻게 만들어내 어떻게 대규모 소비로 연결시키고 있는지를 관찰해보라. 사실 이제 인간은 시스템 전체의 기계적 과정에 무비판적으로 조종당하는 상태가 아닌가?
나는 경제학 교과서를 믿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도래는 곧 250년 전에 시작된 기계제 생산프로젝트가 이제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의미와 위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결코 ‘시장에 맡기는 식으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