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강정>에 이어 <삼체>를 봤다. SF계의 노벨상이라는 휴고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한 류츠신의 소설 <삼체>를 각색한 드라마다. 언뜻 지구의 과학 발전을 중단시키려는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드라마가 공개된 올해 3월은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대폭 삭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연구 현장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공감하며 봤다는 과학자 지인들이 많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과학 연구를 하지 못하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체인. <삼체>에서 지구로 오는 중인 외계인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오는 중’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설정이 흥미롭다. 삼체인이 원래 살던 행성은 태양이 세개인 삼중 항성계에 있어 궤도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극심한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던 끝에 태양이 한개뿐이라 기후가 안정적인 지구에 이주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다행히 이 행성은 지구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지구에 도착하는 것은 400년 후에나 가능하다. 그 시간 동안 삼체인들은 인간들이 자신들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을 갖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반면 인간은 어떻게든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막아내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과학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외계인이 보고 싶었는데 과학자들만 실컷 봤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삼체인이 만든 일종의 양성자 컴퓨터인 ‘지자’가 게임 속 여성 캐릭터 그리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로 삼체인의 생각을 전해줄 뿐 그들의 실제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삼체인을 돕는 중국의 천재 물리학자와 그의 딸 그리고 ‘옥스퍼드 5인방’ 등 다수의 과학자가 주요 인물로 나온다. 그들 중에는 여성도 있고 이민자도 있으며 유색인종도 있다. 다들 나름의 상처도 있고 성격도 다 다르다. 이렇게 성별과 인종, 국적, 성향 등이 다양한 과학자들이 한번에 등장하는 SF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각각의 과학자들이 다양한 배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삼체인과 관계를 맺고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간 많은 SF에서 전형적으로 묘사해온 ‘(서구 백인 남성) 미친 과학자’가 없다는 사실은 <삼체>의 가장 큰 매력이다.
문제는 <삼체>에 등장하는 과학이다. 삼체인을 추종하는 인간 조직이 타고 있는 대형 유조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채 썰듯이 썰어버리는 위력을 가진 나노섬유에, 지구로 접근하는 삼체 함대에 탐사선을 보내기 위해 300개의 핵폭탄을 우주에 배치하고 터뜨리는 프로젝트라니. 그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SF영화나 드라마 어디에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과학기술이다. 대실망이다. 이렇게 다양한 과학자들이 모여도 이렇게 뻔한 과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전세계의 뛰어난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당장 삼체인을 막을 수 있는 성과를 내라고 종용하는 ‘행성방위이사회’ 수장 ‘웨이드’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참신하기로 따지면 <삼체>보다는 <닭강정>의 과학이 한수 위다. 어느 날 갑자기 ‘닭강정이 되어버린 딸’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 ‘모든기계’ 사장 최선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닭강정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생명체를 조작하는 무리한 실험을 하거나 외계인을 전멸시키는 무기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면서 위기의 원인을 찾아나갔다. 웨이드의 통제를 거부하고 400년 후 인류 생존의 문제가 아닌 지금 현재의 저개발지역 문제에 주목하는 과학자 ‘오기’가 그와 비슷하다. 다음 시즌에서 오기의 역할이 빛난다면 <삼체>가 <닭강정>만큼 재밌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