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볼게요. 이브 몽탕처럼 멋진 분일 것 같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를 처음 만났을 때, 어느 배우가 잡지 인터뷰에서 이 책을 언급했었다고 말씀드렸다. “아직 한국 배우들을 잘 모른다”는 그에게 <아나키스트>를 추천했다. 2002년은 선생을 만난 첫해이자 선생을 가장 자주 만난 해다. 뜨거운 해였다. 칼럼을 썼다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던 나의 사소한 곤경을 위로하던 선생은, 당적 보유와 선거 운동 참여 문제로 회사에서 고초를 겪었다. 그 와중에도 그가 굽는 만두는 일품이었다.
“<나는 서울의 요리사>는 언제 나옵니까?”
“연극배우가 된 것 같아. 그것도 초현실극의.”
종로의 한 생선구이집에서 ‘진보신당 대표 홍세화’는 수줍게 토로했다. 그 당에서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모두 떠날 때 나는 그의 등판을 예감했다. 모든 방면의 사회운동에서 약자 편이었던 선생은 정치적 기로에서도 항상 가장자리로 향했다. “노무현씨가 됐으면 좋겠다”면서도 그 직후 노풍이 불 무렵 민주노동당에 입당했었다.
민주노동당 분당 국면에선 선도 탈당-신당파의 정신적 지주였고 그 대가로 강연 요청과 원고 청탁이 급감했다. 선생은 지지자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에 비해 언론자유가 위축되었다고 느낄 만큼 자기검열을 하며 이 글을 쓴다.” 선생의 이 글이 나온 2019년 10월 나는 나대로 맹공을 받고 방송에서 줄줄이 하차 중이었다. 두달쯤 지나 지하철 객차에서 내가 선 자리 앞에, 거짓말처럼 선생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진보의 원칙을 지키는 투쟁에 합세했고 오랜만에 가까이서 그와 함께한다는 데 들떴다. 선생은 “민주 건달들”에게 “진보를 참칭하지 말라”고 단호히 일갈했다. 일찍이 그는 경고했었다. “앵톨레랑스(불관용)에는 앵톨레랑스”라고. 타락한 것은 저들일 뿐, 선생은 변함없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 정복, 소유, 추출의 대상일 때, 인간도 다른 인간의 지배, 정복, 수탈, 착취의 대상이었다.” 유아기에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았고 20년을 난민으로 지냈던 선생은 기후 위기의 창궐과 자신의 병마 속에서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이 최악의 날들을 끝내기 위해 자발적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켰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빠리’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날은 선생의 첫돌이었다. 그를 포함한 만인이 선언처럼 살기 위해 싸웠지만, 전쟁과 독재, 차별과 불평등의 시대는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우군이 된 자연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도 소유주의가 끝없이 밀어붙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의 가해와 피해를 모두 고스란히 받아온 자연과의 연대를 통해, 선생은 마침내 자신의 이름 ‘세계 평화’를 풀어냈다.
“루~ 루 루루 루루루 루루 루루 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선생을 배웅하고 오는 길 하염없이 들으며 불렀다. 어느 날 택시 안에 이 노래가 흐른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운전사의 얼굴을 바라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