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좋아한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맹세코 부끄럽지 않다. 그걸 말하기가 쑥스러울 뿐이다.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마치 내가 시에 대해 잘 알고, 어쩌면 쓰기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다. 아니면 내가 약간은 문학적 허영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그래서 거의 비밀인 것처럼 시를 좋아해왔다. 꽤 오랫동안.
청소년일 때부터 좋아하는 시들을 옮겨 적는 공책이 따로 있었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너무 부끄러워서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는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적었다. 한용운의 <복종>이나 조지훈의 <낙화>, 김수영의 <풀> 같은 시. 용돈이 생기면 이름을 아는 시인의 시집을 샀다. 아는 시인이 많아져서 언젠가부터 공책을 접었다. 대신에 외우기 시작했다. 한 연이라도, 한 행이라도.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정철의 <사미인곡>을 너무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외워버렸다. 지금도 일부는 외울 수 있다. 대학에서는 교육과정 내내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여성 시인들을 알게 되었다. 시의 내용도 표현도 낯설어서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이전의 시들로 아름다운 언어를 배웠다면, 새로 배운 시들로 날카롭게 찌르는 언어를 배웠다. 나는 둘 다 좋아했다. 한글 프로그램을 쓸 줄 알게 된 다음, 나는 시를 실컷 옮겨 적었다. 그걸 출력해서 사무실 책상 앞에 붙여두는 게 좋았다. 일하다 잠깐 고개를 들면 잠깐 딴 세상에 다녀올 수 있으니까. 시는 정말 이상하다. 글자로 쓰여 있는데 왜 이미지가 떠오를까.
“왜 그럴까?” 어린이들과 시를 읽으면서 물어보았더니 대부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한명의 어린이만 말없이 내 눈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나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눈길로 어린이의 대답을 받았다. 그날 어린이들과 윤동주의 <반딧불>을 읽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던 어린이들에게 그믐밤은 달이 안 보이는데, 이 사람은 숲속에서 달빛을 찾은 거라고 설명했다. 윤동주가 어떤 사람인지도. 어린이들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우리는 그 시를 외우기로 했다.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나중에는 어린이 모두와 눈을 마주쳐가며 이 사랑스럽고 강인한 시를 나누었다. 이럴 때 내가 독서교실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정말 좋다. 펄쩍 뛸 만큼 좋다.
솔직히 요즘 시집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거기에 가장 신선한 언어가 담겨 있다는 건 알기에 알쏭달쏭한 채로 계속 읽는다. 한편으로 나처럼 옛날 문법으로 시를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인들이 옛날 시도 계속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부끄러워서 말 못해온 독자들이 있다면 털어놓듯이 말해버리자. 시를 좋아한다고.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을 설치던 밤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출근 가방에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인의 시집을 챙겨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지금 교실 칠판 한구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그러니까 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