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 들어가 토끼를 잡는 법’에 관한 재미난 만평이 있다. 4시간의 수색을 마치고 나온 CIA는 “모든 정보원들이 수풀 하나하나 돌 구석까지 샅샅이 정밀수색한 결과 토끼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고 결론짓는다. FBI는 24시간이 지난 뒤 “토끼는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발표한다. 마지막으로 KGB는 20분 만에 만신창이가 된 곰 한 마리를 끌고 온다. 곰은 자백한다. “저는 토끼입니다. 저희 부모님도 토끼입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신작 <노 베어스>를 보다가 문득 이 웃기고 섬뜩한 만화가 떠올랐다. 때론 조금 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구 소련 수사 기관의 무능과 부조리를 조롱하는 이 4컷 만화를 지금 다시 보니 공포를 동력 삼아 작동하는 권력의 설계도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때때로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한 사람, 한 집단, 한 국가의 역사는 선형적으로 인식되지만 시선을 대륙, 지구 단위로 공간을 넓혀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전쟁과 학살, 권력의 억압과 폭력 등 우리가 과거의 것으로 흘려보낸 끔찍한 기억들은 세계 각지 현실로 실시간 진행 중이다. 다만 여기서 실감하기엔 너무 멀기에 어떤 비극은 단지 정보에 그치고 만다. 이 간극을 근본적으로 메우는 건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위태로운 다리 하나 놓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나는 영화에 그런 힘이 있다고 믿는다. 뉴스와 파편적인 이미지 정보로는 미처 담지 못할 영역까지 건드리는 공감과 상상의 다리. 비결은 정보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공백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핵심이다.
<노 베어스>를 보며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건 이것이 그저 이란의 현실, 자파르 파나히의 현재를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나의 현실(중 일부)가 되었다. 나는 <노 베어스>에서 2024년 한국을, 오늘이 있기까지 한국 사회가 걸어온 길을 마주한다. ‘거리감’이라는 게 참 신기한 것이 물리적인 단위뿐 아니라 시간에도 적용된다. 젊은 세대에게 ‘서울의 봄’은 먼 과거의 일, 남의 일이나 진배없었다. 결과로서의 민주주의는 남았지만 그에 이르는 과정은 지워졌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모든 영화는 과정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영화 <서울의 봄>은 그 과정을 망각에서 건져 올려 현재와 겹쳐놓았다. 그리하여 겪어본 적 없는 세대들은 영화를 교두보 삼아 과거와 소통 중이다.
자파르 파나히가 영화를 통로 삼아 시공간을 초월하는 방식은 일견 ‘프레임 이론’을 닮았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할 때 코끼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그곳에 곰이 없다’는 호소는 역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곰의 힘을 실감케 한다. 곰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제도, 권력, 관습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곰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묻는 건 의미 없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곰이 자리 잡는지, 공포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2024년 한국 사회에도 대문짝만하게 팻말이 걸려 있다. (이제) 여기엔 더이상 곰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곰은 어디에나 있고,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거짓이 점점 더 교묘해지는 시대, 누가 곰을 토끼로 바꾸고 있는 중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