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번 나가보지도 못하고 기간 종료된 헬스장 문을 겸연쩍게 다시 두드린다. ‘처음은 가볍게’라는 핑계로 운동 같지도 않은 운동을 마치고 시내 나가는 길. 버스에서 괜히 어학원 수강료 한번 검색해본 뒤 마지막으로 서점 한 바퀴. 새해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도는 코스다. 올해는 헬스장보다 건강검진을 먼저 받아봐야 할 것 같고, 어학원 대신 어학 앱을 찾아보는 등 해마다 디테일에 변동은 있지만 본질은 변함없다. 새해에는 달라져야겠다는 각오 절반.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절반으로 시작하는, 예정된 배드 엔딩. 꾸준히 실패에도 같은 실수를 적극적으로 반복하는 건 이거라도 해야 내가 덜 모자란 인간이 될 것 같은 불안 때문이다. 연말이 감사와 반성에 젖어드는 과거 시제의 단어라면, 새해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의 미래 시제에 묶여 있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의 주술.
오랜만에 서점을 찾았더니 베스트셀러 코너에 온통 쇼펜하우어다. ‘기대가 낮으면 실망도 적다’를 모토로 살아온지라 예전부터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같은 쇼펜하우어의 경구들을 피난처 삼곤 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200년 전 괴팍한 철학자가 대세가 된 세상이라니 기묘할 따름이다. 개인적인 호불호와 별개로 염세와 고통의 철학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가 널리 읽힌다는 건 시대의 피로를 반영하는 새드 엔딩처럼 다가온다. “타인에 좌우되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은 기준을 자신의 내면에 두는 것이다. 자존에 뿌리내린 적극적 고독은 ‘염세주의자의 단절’이라 비난받던 행위마저 ‘내면을 향한 탐색’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다. 가면과 허영을 벗고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쇼펜하우어의 조언은 미디어 이미지 과잉의 시대,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한 해독제로 소화 중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꾼다고 할까.
새해가 됐지만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건 없다. 변화란 극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나이테나 지층처럼 시간의 축적을 보여주는 흔적에 불과하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 역시 결과가 아니라 태도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겠다는 태도. 그마저 마음에서 몸으로, 의지에서 습관으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2024년 한국영화를 둘러싼 상황 또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예정된 위기와 침체가 거대한 파도처럼 저 멀리 밀려오는 게 보인다. 파도를 없앨 수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파도로부터 달아나는 게 아니라 슬기롭게 넘어가는 거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파도를 헤쳐나가는 동안 닥칠 고통의 시간을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 보며 성찰과 변화의 계기로 삼는다면 더 단단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올해 개봉할 한국영화들의 면면에서 해야 할 일을 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마주한다. 사실 쇼펜하우어는 의외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의 의지를 불태운 사람이었고, 그의 염세주의는 어떻게든 현재를 행복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결과물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나를 긍정하고자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각오를 동반한 부정의 해피 엔딩. 막연한 희망보다 언젠가 찾아올 회복의 가능성을 믿으며 2024년 걸음을 딛는다. “도망치지 않으려/ 피해가지 않으려/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이승환의 <물어본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