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은 임기가 있고 의회에서 ‘n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이상으로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들에 국회의원 소환제 따위는 없다(영국에 있다는 건 잘못 알려진 것이다).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잘 뽑는 것이 목표고, 선거에서도 개별 의원이 아니라 의회 전체의 구성에 주안점을 둔다. 투표로 의원 1명만 정하는 소선거구제는 국가 체계가 미숙하던 시절 중앙 권력과 지역 유력자가 결탁한 산물이다. 미국과 영국은 거기서 멈췄지만 민주주의 수준이 더 높은 네덜란드, 스웨덴 등등은 100년 전쯤 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자질이 떨어져서 선거제도든 권력구조든 바꿔봤자 소용없다”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있다. 구조를 통찰하지 않으면서 인물은 어떻게 가려낼지 궁금하다. 같은 배우도 극의 작품성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나는 지금 한국 정치인들의 면면이 괜찮다고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왜 나쁜 사람이 정치를 하게 되거나 멀쩡한 사람도 정치를 하면 망가지는가. 한국은 총선을 치를 때마다 국회의원이 절반쯤 바뀐다. 여느 선진국보다 높은 교체율이다. 물갈이를 한다면서 더러운 물은 놔두고 물고기만 간 것이다. “몰랐나? 원래 세상은 더럽고 인생은 서럽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담도 있건만 정치는 ‘인물’이 아니라 ‘구도’가 한다는 이치는 캐비닛 안 대외비 문건처럼 취급받고 있다. 2022년 지방선거 직전 나는 어느 기구의 초청을 받고 기초의원 시절 활동을 소개하는 강연을 했다. “지방의원이 어떻게 이렇게 크고 많은 일을 했느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내가 아니라 의회가 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내가 활동하던 당시 해당 지역에는 2인선거구가 줄고 3인선거구가 몇 군데 생겼다. 무소속 및 소수정당 의원이 늘어나 다원적인 의회가 구성됐으며 갈등과 협력이 원활했다. 나는 내 정책을 그 사이로 밀어넣었을 뿐이다. 다수 선진국은 정당에 지지율만큼의 의석을 줘서 다양한 여론을 반영한다. 그중 상당수 국가는 정당 명부에 후보들의 이름도 올리는 ‘개방형 명부’를 채택했는데, 놀랍게도 스웨덴과 네덜란드 등지의 유권자 다수는 지지 정당만 표기하고 후보 선택은 생략한다. 다양한 세력이 구도를 형성하면 그 속에 누가 있든 알아서 굴러가는 맛이 생긴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는 의회의 다양성은 물론 의원의 질도 떨어트린다.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의 경우 북유럽이나 독일의 정치인이었다면 안정적으로 다선을 하며 최고 지도자직을 준비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국적 인기의 정치인도 지역구에서 1등을 못하면 국회의원 300명 안에도 들지 못한다. 국회는 국가대표급이 못 되는 골목대장들과 줄서기와 조아리기에 능한 하수인들로 득시글거리고, 게다가 1 대 1 구도니 비생산적 경쟁이 되풀이된다. 한국 거대 쌍당이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조금 보완하는 비례대표제 개혁마저 좌초시키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런 판을 다른 말로 윈윈이라 안 합니까?” 전세계 정당정치사를 요약해 폭로한다. 유능한 다수파는 다자구도를 활용하고, 무능한 다수파는 양자구도를 강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