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가 독서 교실에 윷놀이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어린이들은 독서 교실에 놀거리를 잘 가지고 온다. 공깃돌부터 트럼프 카드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런데 윷놀이는 정말 뜻밖이었다. 게다가 봄이가 가져온 윷은 척 봐도 아주 좋은 나무로 만든 ‘작품’이었다. 놀이 방법을 적은 책자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영어로만 쓰여 있었다. ‘백도’(표준어다)도 ‘BACK DO’라고 표시되어 있어 색다르게 느껴졌다. 봄이는 어머니가 회사 일로 어찌어찌 갖게 된 걸 자기한테 주셨다고 했다. 짐작하건대 외국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고급 기념품인 것 같았다.
“윷놀이는 전통 놀이야. 알고 있지?” 봄이는 “그걸 누가 몰라요?”라며 나에게 핀잔을 주더니 “근데 전 몰랐어요” 하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학교에서 배우긴 했는데 이해가 잘 안 가더라고 했다. 독서수업을 먼저 하고 시간이 되면 윷놀이를 하자고 했지만 봄이는 완강했다. “선생님이랑 하고 싶어서 일부러 가져온 건데, 그냥 먼저 하면 안돼요?” 많은 한국인이 알겠지만, 윷놀이는 결코 쉽게 끝낼 수 없는 게임이다. 일단 시작했다 하면 최소한 땡땡이다. 나중에 봄이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고하는 수밖에 없다. 방석을 모아 윷 던질 판을 만들었다. 봄이한테 윷의 점수를 읽는 법과 윷판에서 말을 움직이는 요령을 설명했다. 봄이는 규칙은 뒷전이고 윷을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나의 특기 중 한 가지는 어린이한테 ‘잘’ 져주는 것이다. 진지한 태도로 점수 차이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가끔 내가 앞지르기도 하다가 아깝게 져준다. 몇수 앞을 보아야 하고 연기도 잘해야 한다. 솔직히 나는 둘 다 잘한다. 특히 졌을 때 약 올라 하는 연기는 나 자신도 깜빡 넘어가서 ‘아, 괜히 져줬나’ 싶어질 정도다. 그런데 윷놀이만은 그럴 수가 없다. 연기는 둘째치고 윷 점수를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십수년 만에 윷을 던지는 순간에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좋다. 오래간만에 승부다운 승부를 보겠군.
첫판은 내가 이겼다. 말을 잘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말 두개를 업어서 움직였는데 봄이는 그냥 하나씩 하겠다고 한 게 승패를 갈랐다. 한판 하면서 감을 잡았는지, 두 번째 판에서 봄이는 더 의욕을 보였다. 말을 야무지게 놓고 다음에 무엇이 나와야 좋은지 헤아렸다. 그러다 너무 힘껏 던지는 바람에 윷이 방석 밖으로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건 무효라고 했더니 봄이는 “진짜예요?” 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런 의심을 받을 바에는 그냥 지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윷은 눈치도 없이 자꾸 내 편을 들었다. 윷과 모가 연달아 나오더니, 심지어 거의 다 난 봄이 말을 내가 잡게 되었다. 봄이는 제발 지나가 달라고 애원했지만, 규칙은 규칙이라 그럴 수 없었다. 봄이는 내 말을 잡고서 “선생님 말도 제가 업어주면 안돼요?” 했는데. 이렇게 괴로운 게임을 해외에 내보내도 되는 걸까? 나는 세판을 내리 이겼다.
실망한 봄이한테 사탕 통을 건넸다. 색깔마다 다른 과일 맛이 나는데, 흰색 사탕은 무슨 맛인지 우리 둘 다 몰랐다. 똑같이 흰색 사탕을 입에 넣었다. 무슨 맛이지? 파인애플 맛인가? 봄이랑 마주 보고 사탕 맛을 생각하는 게 좋았다. 그래, 세상에 이기고 지는 것만 있는 건 아니지. 봄이는 어린이니까 승부 같은 건 벌써 잊었을 거야. 그때 봄이가 말했다. “제가 윷놀이 열심히 연습해서 다음에는 이길게요.” 그래요, 승부를 다시 시작합시다. 연말에는 사탕을 먹고, 새해에 다시 겨룹시다. 열심히 살면서 행운도 바라봅시다. 우리 모두 새해 복을 많이, 아주 많이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