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겐 각자의 겨울이 있다. 내 경우엔 겨울 하면 <성냥팔이 소녀>가 자동 연상된다. 이 의식의 흐름에는 나름의 프로세스가 있는데, 우선 소복하게 눈 쌓인 거리에 서서 추위에 몸을 떨며 실내를 바라보는 모습이 기본 배경이다. 이어 여러 가게에서 새어나온 불빛 덕분에 거리가 주황빛으로 물들면 차가운 거리마저 따스하게 데워지는 기분이다. 이쯤 되면 노래가 한곡 흐를 차례. 머릿속 음반은 해마다 바뀌는데 최근엔 마이클 부블레가 부른 가 재생 중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해./ 어디를 가든/ 잡화점을 봐. 다시 반짝이고 있어/ 지팡이 사탕과 화려하게 꾸며진 마을.” 실은 한번도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만큼 보편적인, 내 안의 겨울 풍경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며 오랜만에 겨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술에 의지해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와 폐기 처분할 음식을 챙겼다고 실직 위기에 놓인 마트 직원의 만남은 앞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 가능하다. 그런데 웬걸. 희망이라곤 없을 것 같은 암울한 상황인데도 의외로 분위기는 구김살 하나 없이 해사하다. 현실이 차갑고 어두울수록 성냥불 하나의 온기가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추울수록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창 안의 세상을 지켜보는 심경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 동화에 매료 중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동화(童話)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아이처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비결은 실로 잔혹하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거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속 인물들은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기에 현실을 덤덤하게 있는 그대로 마주‘당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시선에 쓸쓸함은 있어도 부끄러움은 없다.
최근 TV와 스크린은 과거의 영웅에 매료되었다. <서울의 봄>은 이태신을 통해 우리 역사가 겪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실패의 경험을 제공한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대의와 미래 세대를 위해 목숨마저 불사르는 이순신의 최후를 현재형으로 되살린다. 간만에 KBS 수신료의 가치를 증명 중인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고려의 무신 양규를 대중에 전파 중이다.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홀로 막고 3만명의 고려 유민을 구해난 양규의 활약은 가히 고려를 구한 성웅으로 재조명받아 마땅하다. 한때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분 건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 정의가 부재한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사라진 정의에 대한 결핍은 질문과 분노로 이어졌다. 하지만 불같은 분노가 빠르게 꺼지고 나면 결국 정의가 사라진 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지금 대중매체를 통해 과거의 영웅들이 속속 부활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대는 영웅을 요구하고 사람들은 망가진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이를 갈구한다. 바야흐로 겨울이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각자 손에 성냥을 들고 TV와 스크린에 불을 지피는 중이다. 과거의 영웅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위안을 안긴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는 성냥불이 만들어낸 환상 너머를 보며 현실로 확장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아직, 한줌 온기가 전하는 위안보다는 지금이 겨울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잔잔한 고통이 더 미덥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내 안의 만들어진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털어내고 문을 나선다. 진짜 겨울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