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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 별 셋 짜리 영화를 위한 밤
송경원 2023-12-15

취미가 뭐예요? 살면서 받아온 질문을 리스트로 짠다면 상당히 앞자리에 있을 텐데 여전히 답하기 쉽지 않다. 어렵다기보다는 애매해서다. 사전을 뒤져보니 ‘경제적 이익이 없어도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하는 좋아하는 일’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당장 떠오르는 건 독서와 영화 감상인데 대한민국 모두의 공식 취미인지라 ‘취미 없음’이나 다름없어 보일까 매번 소심하게 구석으로 밀어둔다.

그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쏟는 일이라면 공상(이라 포장하고픈 망상)이다. 멍하니 혼자만의 세계로 떠나는 걸 시도 때도 없이 즐기는 편이다. 연말을 맞아 올해의 영화 리스트를 뒤적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빠진다. 놓친 영화가 참 많구나. 이건 좀 길고 어려울 것 같은데. 이중에 10년이 지나도 다시 소환될 영화가 몇편이나 될까. 올해 가장 좋았다는 영화들을 정리하다 문득 물색없이 중얼거린다. 아, 이런 영화들만 하루 종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잠깐. 진짜 좋을까?

영화기자를 업으로 삼은 후 유독 힘든 점 중 하나는 보기 싫은, 좋아하지 않는 영화도 구태여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봐야 한다는 거다. 영화기자 월급의 상당 부분은 (취미로는 절대 보지 않았을) 힘겨운 영화를 꾸역꾸역 보고 버텨낸 값이라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극장을 나설 때 ‘이걸 보려고 반나절을 투자한 건가’ 싶은 허탈감에 없던 피로까지 몰려오는 게 다반사다. 그런데 연말이 되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실망스러웠던 영화들이 어느새 어여뻐 보인다. 실망스러웠던 영화들이 다른 얼굴로 찾아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문득 감사한 마음이 차오르고 겸손하게 자세를 가다듬는다.

사실 명작 리스트를 찬찬히 살피다 보면 가끔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깊이 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꾹꾹 눌러담은, 밀도 높은 영화들‘만’ 본다면 계속 감탄하고 좋을 수 있을까. 좋은 영화, 정확히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 보면 정말 행복할까. 적어도 나는 그렇지 못할 것 같다. 걸작이 걸작일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범작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머지 시간들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범작들이 걸작을 위한 배경이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대부분은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의 연속이다. 범상해서 기억되지 않는 일상의 시간은 일종의 숨구멍 같다.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저 아직 의미가 되지 않은(어쩌면 영원히 의미가 되지 않아도 좋을) 순간들. <미스터 션샤인>의 김희성(변요한)의 말을 빌리자면 “내 원체 무용(無用)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연말 베스트를 꼽을 때가 되면 별 셋짜리 영화들은 무용한 영화가 된다. 마치 없었던 영화처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고 기록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일부러 이 기억들을 꺼내어본다. 고백하자면 별점과 한줄 평 그리고 연말 베스트 리스트는 영화기자가 짊어진 업보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영화를 평가하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창작자에 대한 점수 매기기가 아니라고 소심하게 항변하겠다. 이건 (산업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최소한의 지표를 세우는 작업이자 오직 대중을 향한 말 걸기다. 각기 다른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극장으로 오시라는 눈높이 가이드라고 해도 좋겠다. 그럼에도 마음이 편친 않은 게 사실이다. 직업적 책무라곤 하지만 한편의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와 애정이 들어가는지 모르지 않는 입장에서 마음 한구석 죄송함을 품고 1년을 보낸다. 그리고 한해의 마지막, 올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버텨준 범작들을 한편씩 떠올리며 감사와 반성의 밤을 지샌다. 영화기자가 된 후 생긴, 연말에만 허락된 소소한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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