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극장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끝나지만 어떤 영화들은 스크린이 꺼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전자의 영화들은 부스러기가 없다. 친절한 설명과 깔끔한 마무리로 이야기의 매듭을 묶어 극장 안의 쾌락을 보장한다. 반면 후자의 영화들은 스크린의 막을 최대한 얇게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일상이란 이유로 망각했던 시간은 카메라에 포착되고, 스크린 바깥으로 스며나와 또 다른 진실로 피어난다. 이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는 태도와 지향의 차이다. 하지만 평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대체로 후자의 영화에 끌리는데, 자신의 감흥을 고백할 자리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가 구태여 영화라는 허구를 마주하는 건 옆자리의 누군가에게(혹은 세상에) 말을 걸기 위해서다.
흑백으로 나누면 세상 모든 게 명쾌하다. 선과 악, 적과 아군, 옳고 그름으로 나뉜 이분법에 갈등과 충돌은 있어도 미혹과 근심은 없다. <서울의 봄>을 둘러싼 사람들의 다채로운 반응을 접하며 세상 영화를 두 종류로 구분했던 자신의 오만을 되돌아보는 중이다. 솔직히 이 영화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서울의 봄>은 얼핏 후자의 영화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좋은 의미에서) <서울의 봄>은 명백히 전자의 영화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역사는 차라리 리얼리티를 증폭시키는 배경에 가깝다. 왜곡과는 다르다. <서울의 봄>은 현실의 회색지대를 지우고 명백히 선악으로 나뉜 캐릭터의 매력을 탐닉하는 이분법적 상상력의 영화, 일종의 대체 역사 팬픽 같은 결과물이다. 다만 이 대체 역사는 ‘서울의 봄’이라는 미래 시제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역전되어 있다.
<서울의 봄>은 역사를 전혀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친절하다. 김성수 감독은 거의 교육 다큐멘터리라 해도 무방할 만큼 꼼꼼하고 효과적으로 사건의 내막과 진행 과정을 상세히 안내한다.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역사와 연루자들로부터 영화를 깔끔하게 분리시킨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안전한 자리에서 마음껏 분노할 수 있는 2차 창작물의 자리를 확보한다. 사실 이런 식의 역사 소재의 영화들은 대부분이 사이다의 카타르시스로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하지만 <서울의 봄> 내내 들이차는 건 불의의 승리를 마주해야 하는 불쾌감의 쾌감이다. 그리하여 이 단순 명쾌한 영화는 극장의 불이 켜진 다음부터 복잡미묘한 자리에 선다. <서울의 봄>에 진짜 ‘서울의 봄’은 없다.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영화는 언젠가 올 서울의 봄을 기다리는 실패와 좌절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 역사와 다른 점은 제대로, 멋들어지게 실패시킨 뒤 봄을 기다린다는 거다. 현실의 우리에겐 과거, 영화 속 그들에겐 미래형의 제목이 다양한 입장의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소환한다.
흥행 분석만큼 부질없는 게 없다. 한길 사람 속도 모르는데 수백만명의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까. 그럼에도 얼어붙은 극장가에 이른 봄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흥행세를 보며 말을 보태지 않을 도리 또한, 없다. 이전이라면 <서울의 봄>을 두고 스크린 안의 판타지로 끝나는 (잘 만든 상업)영화로 단언했을 것 같다. 지금은 이 정확한 실패의 상상력을 통해 현재를 버틸 위안을 얻는다. 계절은 돌고 돌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다시 한겨울이다. 갈수록 엄혹해지는 상황 속에 최근 “극장은 귓속말을 하는 장소”라는 젊은 영화인의 수줍은 고백을 듣고 희망을 발견했다. 각자도생의 시대, 우리에겐 더 많은 속삭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호에선 <서울의 봄>을 읽는 다양한 시선과 함께 영화와 속삭이는 책의 목소리를 함께 모아보았다. 다시 봄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