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도시의 문화행사에 강연을 하러 갔다. 기차 시간을 여유 있게 잡은 덕분에 행사장에 일찍 도착했다. 점심도 먹었겠다, 강연 장소에 열린 북 페어를 기분 좋게 구경했다. 몰랐던 지역 출판사의 책과 동네 책방 사장님들이 세심하게 골라온 책, 엽서와 스티커, 심지어 그것들을 담을 천 가방까지 샀다. 내 책을 판매하는 부스들도 있었다. 예정된 강연을 고려해 내놓은 것이려니 하면서도 우쭐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중 한 책방 부스에서 짐짓 무심한 척 그림책들을 뒤적이는데, 옆에서 한 어린이가 한참 들여다보던 그림책을 샀다. 사장님은 본인이 그 책의 작가라면서 책에 사인을 해주셨다. 나도 그 책을 사면서 사인을 청했다. 내 이름을 대자 “혹시?” 하고 나와 내 책을 번갈아 보는 작가님한테, 나는 전부터 한번은 해보고 싶던 것을 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기. 곧장 너무 창피해져서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옆에 있던 청소년 둘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자 작가님은 내 책을 가리키며 “작가님이세요” 하고 소개했다. 나는 조금 전의 결심을 피의 맹세로 상향 조정했다. 내 사정과 상관없이 청소년들은 “우와! 정말이에요?” “허업!” 하면서 놀라는 시늉을 했다. 마음속으로는 혹시 이들도 내 책을 읽었나 싶어 설렜지만, 이번에는 처신을 잘해야 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책을 썼는 줄 알고?” 답이 왔다. “모르죠. 아무튼 작가라고 하니까.” “작가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거 처음이에요. 대박!” 그들은 강연이 시작되는 것도 안 보고 나갔다. 나랑 사진까지 찍어놓고, 내가 무슨 책을 썼는지는 끝내 모르는 채로.
그날 강연 중에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질문을 주셨다. 해가 바뀌어도 같은 나이의 아이들을 만나는데 자신은 나이가 들어가니 어떻게 하면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이었다. 전에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비슷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서 나는 생각해둔 답을 드렸다.
“저는 어린이가 다양한 선생님을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경력은 적지만 친근한 선생님, 경력이 적어서 엄격한 선생님, 연륜이 있어서 너그러운 선생님, 연륜이 있고 엄격한 선생님. 학년과 학교 사정에 따라 여러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어린이에게 주어지는 기회니까요. 조금은 냉정한 선생님, 노래를 못하는 선생님, 덤벙대는 선생님, 아픈 선생님, 피부색이 다르거나 장애가 있거나, 둘 다인 선생님도 만나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는 선생님을 통해 삶의 여러 모습과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것 아닐까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선생님은 날마다 ‘가까이에서 보는’ 의미 있는 어른이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위상은 어쩌다 마주친 (허세에 찬) 작가와는 전혀 다르고, 소방관이나 과학자와도 다르다. 그러니 선생님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사회를 위해서도 그분들에게 안정과 인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그게 잘되고 있는 걸까? 지난여름 나이도 사는 곳도 다른 선생님들이 마치 하나인 듯한 검은 물결로 도심을 뒤덮었던 일이 떠올랐다. 잇따른 동료의 죽음에 크게 흔들리고 두려우셨을 선생님들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겨울을 맞이하고 계실까. 오늘도 교육 현장의 변화를 위해 나아가는 선생님들께 응원과 사랑을 보낸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