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치권력의 핵심 중 핵심으로 알려진 모 의원이 속칭 ‘험지 출마’ 요구를 받았다. 그의 응답은 실로 호기로웠다. 지역구 지지자로 이뤄진 산악회 창립기념식을 연 것이다. 100대에 가까운 버스가 동원됐고 수천명이 체육관에 운집했다. 한때 엄청난 욕을 먹었던 광고,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로 답했습니다”가 떠올랐다. 멸사봉공의 자세로 사지를 향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파란 눈의 대통령”이 던진 말에, “웃기시네요”라고 답한 격이다. 실제로 각종 언론 보도에 올라온 사진 속에서 그는 여봐라는 듯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건 솔직히 관심은 없다. 대단한 뭐라도 되는 양 자신이 하는 모든 말에 엄청난 무게를 싣는 그도 우습고, 양손을 들어 환호하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마이크를 쥐고 부흥사 행세를 하는 또 다른 그도 마뜩잖다. 나는 그저,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듯한 이 모든 광경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보통의 한국인과는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는, 미국 선교사의 자손인 의사를 세워서 “파란 눈의” 어쩌고 해대는 꼴도 그렇고, 전두환의 체육관 선거를 연상케 하는 그들의 집회도 그렇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김영삼마냥 지지자들에게 알록달록한 산악회 옷을 입혀놓은 모양새도 그렇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세상의 시계는 하나가 아니며, 그 각각의 시간 역시 미래로만 흐르지 않는다. 산악회와 체육관이 만난 곳에서의 시계는 전두환 시대로 가버렸고, 경제가 어려우니 새마을운동을 되새겨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박정희 시절로 퇴행했다. 4·19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의 기념관을 나랏돈으로 짓고 이참에 광화문광장에 동상까지 세우자는 이들의 사고는 한국전쟁에서 일제강점기 사이 어딘가로 되돌려졌다. 파란 눈의 선교사 자손에게서 구원을 찾는 이들은 말해 무엇하랴. 이러다간 개화기를 지나 구한말까지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더욱이 체육관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종류의 퇴행을 자각하게 한다. 모 방송인(이라고 부르는 게 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름의 번듯한 미디어 생태계를 구축한 인물이니 그러려니 하자)이 공개방송을 준비하는데 그의 정치 성향을 이유로 거절당해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보다는 훨씬 더 조촐하고 훨씬 더 미약한 정치 성향을 지닌 내가 다른 학자들과 함께 펴냈던 언론자유에 관련한 책으로 북 콘서트를 열려 했더니 대관을 거절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단다.
정치 성향이 뚜렷한 산악회는 물론, 물의를 일으킨 온갖 종교집단마저도 체육관을 빌릴 수 있는데, 허위사실로 ‘위안부’를 모욕하고 광주를 난도질한 책들도 성황리에 북 콘서트를 여는데, 선거 때면 내용 없는 책들로 출간기념회를 치르는 정치인들도 수두룩한데.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말하고자 하는 책에서 문제시할 정치 성향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책임이 문제라는 걸까, 자유가 문제라는 걸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만 거꾸로 가는 게 아니다. 내 마음속의 참담한 시계는 슈퍼주니어의 <로꾸거!!!> 정도에서 멈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