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팩터(form factor)’라는 용어가 있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크기나 모양 등 물리적 사양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이제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기기의 제품 외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2G 시대 휴대폰의 형태가 플립, 폴더, 슬라이드 등 다양했다면 (심지어 ‘가로 본능’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폼팩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3G 시대 이후의 스마트폰은 한동안 터치스크린 기능을 장착한 큰 화면과 얇은 베젤을 중심으로 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유사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인간의 외모가 그렇듯 사물의 외형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많은 전문가들이 폼팩터가 단순히 제품의 외적인 요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잘 알려진 대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PC와 아이패드를 각각 트럭과 승용차에 비유한 적이 있다. 트럭과 승용차는 확연히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운전자의 경험 역시 완전히 달라진다. 사용자 경험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패드가 약속한 새로운 사용자 경험은 PC와는 다른 아이패드의 폼팩터와 직결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애플 제품을 사랑하는 이유이자 폼팩터가 중요한 이유이다. 폼팩터가 가장 획일화된 시장 중 하나는 성인용품업계일 것이다. 최근 미성년 여성의 신체를 모방한 성인용품(보통 ‘리얼돌’이라고 불리지만 ‘리얼돌’은 특정 회사의 제품명이지 성행위를 위한 제작된 인체 모형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아니다)이 암암리에 수입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9년부터 논란이 되었던 이 성인용품은 2022년 12월 ‘리얼돌 수입통관 지침’이 개정되면서 사실상 허용되었으나 2021년의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미성년자 신체를 본 딴 성기구는 통관이 불가하다. 문제는 실제 여성이 그러하듯이 인체 모형도 외형만으로 미성년 여부를 규정하기 애매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애초에 왜 성인용품을 핏줄까지 묘사한 인조 피부에 가발까지 붙여가며 인간의 모습 그대로 만드는가에 있다. 정녕 ‘리얼돌’의 혁신은 불가능한가?
혁신은 시간이 가져다주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170여년 후인 2194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정이>를 보라. 최고의 군인으로 전쟁 중에 죽음을 맞이한 ‘정이’(김현주)는 사이보그로 다시 태어나 수많은 전쟁 시뮬레이션에 사용되지만 전쟁 종식 후 결국 ‘리얼돌’로 사용될 처지에 놓인다. 사후에 뇌를 이식하여 사이보그로 영원히 살 수 있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대에도 여전히 실제 여성 모습의 성기구가 만들어진다니!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 중요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구의 폼팩터가 170년도 넘게 그대로인 미래는 안 봐도 디스토피아다.
인공지능을 탑재해서 ‘리얼돌’을 더 리얼하게 만드는 것은 혁신이 아니다. 살아 있는 인간과의 관계맺기가 아니라 기구를 사용해서 성적 쾌감을 얻고자 한다면 그 기구는 인간을 닮을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맞는 형태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장미꽃 모양일 수도, 달걀 모양일 수도 있다.(둘 다 실제로 있다.) 성기구는 리얼하지 않을수록 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