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같은 기억(photographic memory). 흔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무언가를 직접 보는 것 같은 기억력이라고 해서 ‘직관기억’(eidetic memory)이라는 좀더 전문적인 용어도 있다. 직관기억은 성인에게서는 보고되지 않는 특징이며, 아동기의 특정 사례에서도 무언가를 본 직후 아주 짧은 기간만 지속되는 것으로 관찰된다. 그에 반해 사진 같은 기억은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면에서 직관기억과는 구별된다. 스스로 ‘사진 같은 기억력’을 지녔다고 은근히 우쭐해하는 성인들을 만나는 것 역시 드물지 않다.
그런데 사진 같은 기억이든 직관기억이든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세부사항을 기억해내는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 기억력조차도 사진이나 직접관람에 해당할 정도의 정확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게 현재까지의 과학적 결론이다. 음정을 정확히 짚어내는 ‘절대음감’과 음질 차이를 칼같이 짚어내는 ‘황금귀’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들 대부분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쑥스러운 사실이다. 극히 드물게 입증되는 사례인 절대음감조차도 우리의 기대만큼이나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음정이란 음의 상대적 높낮이에 붙이는 이름일 뿐이고, 절대음감이라 주장되는 능력이란 그런 특정 음파 대역을 구별하여 기존 기억에 따라 음정을 호명하는 재능으로서, 일종의 잘 훈련되었거나 아주 드물게 잘 타고난 ‘회상 기억력’에 가깝다.
직관기억이건 절대음감이건 인간의 능력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이른바 ‘천재’를 희구하는 낭만주의적 태도에 기인한다. 100년 전에 이미 베냐민이 언급한 바 있는 이 ‘기술복제의 시대’에, 직관기억이나 절대음감 같은 인간중심주의적 낭만에 매달리는 건 상당 부분 시대착오적이다. 남들보다 그리고 기계보다 더 뛰어난 기억력과 감별력을 소망하고 자랑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다분히 퇴행적인 심리상태를 촉진할 따름이다.
오히려 우리 기억의 부실함과 자의성을 인정하고, 더 객관적인 ‘기록’에 토대를 두어, 더 깊이 있고 역동적인 ‘이야기’로서의 ‘집단기억’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몫이다. 정작 그것이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우리가 잘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음성, 영상, 문자라는 탁월한 기억기술의 도움을 받아 더 정확하고 더 풍성한 기록을 남기도록 사회가 지원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멋대로 취사선택하거나 심지어 왜곡하여 자신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이득에만 복무하도록 날조하고 선동하지 않는 일. 역사적 기록 앞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함께 반성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며 다만 한뼘이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
우리의 집단기억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었을 1945년 8월15일을 주기적으로 회상하는 일은, 여러 기념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의례적 의미를 갖는다. 기록도 무시하고, 특정인들의 왜곡된 ‘감정기억’만 과장하며, 반성과 자부심과 연대의 방향을 영 잘못 잡고 있는 게 분명한, 2023년 8월15일에 마주했던 제78주년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는 그래서 더 암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