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정당과 의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구현하는 정치 노선이다. 7월은 여러 사민주의자들이 마지막 숨결을 남긴 달이다. 1914년 7월31일 장 조레스. 1947년 7월19일 여운형. 1959년 7월31일 조봉암. 그리고 2018년 7월23일,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을 이끌어온 한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2007년 7월부터 두달간 나는 그의 캠프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이었다. 당원들에게 행사에 초청하는 전화를 걸고, 그의 연설이나 토론에 어울릴 카피를 짜고, 그에게 쏟아진 음해에 반박하는 논리를 구성하는 일을 했다. 화장실이나 흡연 공간을 다녀오던 나는 때때로 복도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는 수줍은 소년처럼 배시시 웃으며 눈길을 내렸다. 그는 쉰둘, 나는 스물여섯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의 진면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경선 후반부에 그와 대화할 기회가 부쩍 늘어났었다. 그는 ‘떠나간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늘 “우리가, 내가 잘못해서 떠났다”며 ‘남은 사람의 책임’을 강조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게 되는지 그에게 배웠다. 시간이 지나 내가 그에게 ‘떠난 사람’이 되었다. 아예 다른 정당에 몸담게 된 것이다. 그의 소속 정당보다도 훨씬 작은 신생 정당이었다. 그는 단 한번도 “뜻은 좋지만 비현실적”이라거나 “그만하고 우리와 합치자”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거대 정당에 집요하게 당해온 공세를 더 약한 쪽에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2014년 4월 그는 내가 살던 지역에 강연을 왔고, 기초의원 재선에 도전하던 내게 추천사를 써주었다. 마지막 대면이었다. 낙선한 나는 소속 정당을 키우기 위해 고심했고, 종종 진보정당 초창기의 그를 되짚어보았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내가 쓴 논평이 화제가 되자 트위터에 응원을 남기기도 했던 그는, 내 소속 정당이 총선에서 참패한 뒤 그제야 한 방송에서 오래 묵은 듯한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그 당 사람들도 20년, 30년 고생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나는 고생하기는커녕 정치를 그만두고 새 직업을 찾았으며, 그사이 그는 세상을 떠났다. 2020년 총선 ‘위성정당 파문’에 휩싸인 소속 정당을 빠져나와 무당파가 된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자문도 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노회찬이라면 그러지 않았다”는 말들이 나온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매사 용기 있고 현명했을 것이라 전제할 수도 없다. 다만 이미 경험한 진실만큼은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허물을 음모론이나 군중 동원 따위로 덮으려 한 적 없으며, 증오와 이분법을 유산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가 정치를 시작할 때는 ‘노동’이 중심에 있었지만, 정치를 계속하면서 그는 결코 소수자, 여성, 생태환경을 뒷줄에 세우지 않았다. ‘남 탓’을 무기로 쓰지 않는 것이 그의 민주주의였고, 자신이 먼저 일일우일신하는 것이 그의 사회주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