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와 노랑이는 만난 적이 없다. 같은 학년이지만 학교가 다르고, 사는 곳도 좀 떨어져 있다. 독서교실에서도 수업 시간이 달라서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런 두 사람이 요즘 자신들도 모르게 만나는 장소가 있다. 교실 한쪽, <하이디> <톰 소여의 모험> <프랑켄슈타인> 같은 작품이 놓인 ‘클래식’ 책장 앞이다. 이 책들이 대부분 양장이라 무게를 생각해서 맨 아래 칸에 꽂아두었기 때문에 책 꺼내기가 조금 불편하다. 그래도 한명은 월요일에, 한명은 화요일에 똑같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파랑이는 <삼총사>와 <홍당무> 중에서, 노랑이는 <꿀벌 마야의 모험>과 <폴리애나> 중에서 무엇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는 정도만 다르다.
파랑이는 우리나라 동화를 좋아한다. 우리말로 되어 있어서 작가의 마음을 더 잘 알 것 같단다. 출판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종종 판권도 살핀다. “이 책은 제가 태어나기 10년 전에 나왔네요. 작가분 아직 살아 계세요?” 하고 묻는다. 한번은 어떤 책의 작가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했더니 “인맥이 대단하시네요”라며 놀랐다.
노랑이는 독서교실 그림책 중 안 본 게 없다. 그림책의 독자라면 대개 그렇듯이 노랑이도 같은 책을 보고 또 본다. 글이 많은 동화를 고를 때도 삽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림이 없어도 표지가 예쁘면 일단 읽어본다. 이야기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지만, 마음에 들면 역시 읽고 또 읽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와 삽화가의 조합도 있다. 파랑이와 노랑이는 각자의 길로 같은 책장 앞에 다다랐다. 지난주에는 미리 맞춘 것처럼 둘 다 850쪽짜리 <제인 에어>를 만지작거렸다. 조만간 나도 따라 읽어야 할까 봐 약간 걱정이다. “우리 국어 선생님이 6, 7월이 제일 위험하대요. 날씨가 너무 좋은데 창가에서 누가 책을 읽고 있다, 그러면 백 퍼센트 반한대요.”
공부 삼아 겨우 독서교실에 오는 중학생 하늘이가 말했다. 학교에서는 절대 연애 금지라며 그런 장면을 연출하면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단다. 글쎄 왜 그런 구체적인 예를 드셨을까. 옆에서 다른 중학생이 거든다. “솔직히 책 읽으면 뭐가 있어 보이긴 하지.” 나는 웃음을 참고 물었다. “그 뭐가 대체 뭘까?” 분위기가 있죠, 좀 생각 있어 보여요, 침착한 느낌? 혼자서도 뭘 잘할 것 같아요. 쉬는 시간이면 핸드폰 삼매경인 중학생들이 그날은 집에 가기 전에 청소년문고 서가를 얼쩡댔다. 나는 들고 다니기에 ‘있어 보이는’ 책을 몇권 추천했다. 그런 멋도 독서의 일부다.
읽는 사람들은 읽는 세계 안에서 서로 알고 지낸다. 정치가 책을 미워하고 사회가 책을 소외시키고 경제가 책을 의심해도, 독자는 계속 생겨난다. 브레히트는 “암울한 시대에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 부를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