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 천박해졌다. 이 낡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문장을 써야 할까 잠시 멈칫했지만, 달리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하겠다. 더 맛나고, 더 멋지고, 더 화려하고, 더 높은 것을 얻으려는 데 거리낌이 없다. 죽어라 공부하고,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더 높은 학점을 따고, 더 좋은 데 취업하고, 더 빨리 승진하려는 이유는 그거다. 이들 여러 이유마저도 실은 한 가지 욕망으로 요약된다. 남한테 꿀리고 싶지 않다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데, 정작 중요한 건 꿀리지 않을 욕망인 시대.
2000년대 초반 유학 시절, 고국에서 찾아온 이들과 친분이나 일로 엮였을 때 받았던 느낌이 딱 그랬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투성이였다. 묵는 호텔의 추레함에 대해, 먹는 영국 음식의 맛없음에 대해, 그래서 찾아간 한인식당의 비싼 가격에 대해. 그들은 현지에서 만난, 자신보다 싼 옷을 걸치고 있는 영국인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외양과 옷차림에선 거의 차이도 없는 한인식당 종업원을 무시하는 데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누구나 아파트 이야기를 했고, 주식과 펀드와 변액보험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들과 말을 섞어야 하는 그 시간은 참으로 재미없었다.
귀국 후 이런 분위기에 충분히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런 재미없음은 여전하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만난 교수들은 대부분 전공보다 의대 입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종종 관련 지식마저도 더 많은 듯했다. 처음 만난 이들은 꼭 ‘사는 동네’를 물었다. 오고 가는 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걱정해주는 줄 알았더니만 내 경제적 지위가 자신들보다 높거나 낮은지를 견주기 위한 요점 질문이었다. “논현동에 산다”고 하자 놀람 반 경계심 반으로 쳐다보던 그들은, “아내 직장 가까운 곳에 작은 빌라를 전세 얻었다”고 덧붙이자 이내 안도하는 눈빛을 띠었다. 이제 막 강사 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 학자는 이 두 마디 말을 통해 선배 교수의 무시와 질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탈 수 있었다.
맛나고, 멋지고, 화려하고, 높은 것을 나도 좋아한다. 그런데 그것도 일정 수준을 지나면 ‘질’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로 바뀐다는 것을 안다. 약간 더 맛나고, 멋지고, 화려하고, 높아지기 위해 지불해야 할 돈은, 그리고 그 돈을 얻기 위해 감수해야 할 윤리적 위험은 실로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를 굳이 지불하고 감수하는 건 정말 그게 좋아서가 아니라 그래야 남들에게 꿀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심미적 역량이 더 깊고 각자의 취향에 더 솔직했다면, 한 단계 더 올리기보다 한 걸음 옆으로 발을 옮기는 것이 더 다양한 즐거움과 만족을 준다는 걸 알게 될 텐데 말이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봐 사족을 붙이자면, 천박(淺薄)함은 계급적으로 낮아서(賤)가 아니라 스스로 이룬 지성과 덕성이 얕고도 얇아서 풍겨나오는 일종의 부정적 아우라다. 이를 깊고도 두텁게 하는 데 어느 정도의 돈과 지위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스스로도 남도 피 터지게 해서 얻은 돈과 지위가, 내가 경험해본 그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보다도 더 천박한 인간들을 만들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