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에는 다락방이란 게 있었다. 집을 짓다 보면 생기게 마련인 허드레 공간인 셈인데, 좀 작으면 그냥 ‘다락’이었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여지가 있으면 다락‘방’이 되었다. 어릴 적 나는 이 다락방에서 많은 걸 했다. 사촌 동생과 놀아준다는 핑계로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나는 갖지 못했던 좋은 장난감을 충분히 만져볼 수 있었다. 보퉁이에 싸인 잡스러운 것들을 뒤져보는 재미에 더해 가끔씩 요긴한 물건을 ‘득템’하는 행운도 찾아왔다.
대개는 그곳에서 책을 읽었다. 퍽 학구적인 아동기를 보낸 것 같지만, 실은 계통이 잘 잡히지 않는 독서였다. 이른바 ‘남독’에 빠져 있던 셈인데, 삼중당문고 한국 근대문학 소설에서부터, 일본 대하소설 <대망>의 해적판, 고모가 보던 하이틴 잡지,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산 <생활상식백과>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꿈을 해몽하는 법을 배웠고, 일본의 전국시대를 머릿속에 그려넣었으며, 이름이 비슷한 김동인과 김동리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됐다. 필경 지금의 내 잡학 가운데 3할 정도는 그 다락방에서 만들어졌을 테다.
그때 내가 책을 읽었던 건, 할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텔레비전이 있었다. 하지만 매캐한 담배 연기로 싸인 증조부모 방에 가야 했고, 이분들은 전기를 금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셨다. 골목길에서 딱지와 구슬치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이사로 학교를 멀리 다녔던 까닭에 반 친구는 있어도 동네 친구는 많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놀아야 비로소 성이 차는 유형은 아니었던 나는, 그럴 때마다 다락방에 들어갔다. 움푹 팬 천장을 가로지르는 서까래 위에 아슬아슬하게 누워 문고판 책을 펼치면 비록 문장이나 단어는 생경하더라도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시공간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사람과 사물을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지켜보고 묘사하는 습관이 들었던 것이리라.
오늘날의 집에는 다락방이 없다. 집을 지을 때부터 철저히 계산된 도면에는 손바닥만 한 자투리 공간에조차 구체적인 이름과 기능이 부여된다. 굳이 ‘팬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수납 기능의 공간에는 여전히 잡스러운 물건이 들어차 있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그곳에 처박혀 있으면, 필경 아내나 아이는 심각하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볼 터. ‘우울증’이라든가 ‘중년 히키코모리’ 같은 검색어를 스마트폰에 쳐넣으면서 말이다. 할 건 너무나 많고, 읽고 보고 들을 것들이 차고 넘친다. 직업상 구독하고 있는 동영상 서비스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된다. 학자답게 문자 매체를 고집하고 싶다면, 내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책이 서재에 쌓여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 많은 ‘할 것들’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화면만 쓸어 넘기며 나른해한다. 다락방에 있던 빈곤 속의 풍요를 찬미하려는 것도 아니고, 콘텐츠 폭발 시대가 주는 풍요 속의 빈곤을 개탄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부족함 가운데 풍성함을 일궈냈던 것이 나라면, 너무나 많은 매체에 둘러싸여 나른해져버린 것도 나다. 내비게이션은 기계이고 장치다. 항행자는 결국 나다. 그런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 내 다락방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로 이 작은 지면을 채워갈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