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우리 모두 공평히 받은 선물은 설날 떡국을 먹어도 오히려 줄어든 나이가 아닐까 한다. 그간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한국식 나이를 설명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드디어 세계화의 기준에 맞추어가는 느낌이라는 게시판에 오른 글에 실소와 공감이 겹친다.
태어나며 바로 1살을 얻는 우리네 풍습은 친절하게도 어머니 뱃속에서 보낸 기간을 다 세어주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기간은 10달이 채 안된다. 게다가 12월31일이 생일인 친구가 자신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2살이 되고 말았다는 푸념을 들을 때면 더더욱 그 기준이 합리적인지 의심이 들곤 했다.
학령기에 접어들면 개그 프로의 단골 소재인 “빠른 나이” 논쟁이 더해진다. 신학기의 시작이 3월이라 1, 2월생까지 이전의 해에 입학하던 시절이 있었다. 연도가 달라도 함께 공부하던 그 “빠른 연생” 친구들은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에게 형이라 부르라며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1월생인 내 친구는 띠는 음력으로 하는 것이라며 설날 이전 태어난 자신은 동갑이라 주장하곤 했었다. 띠의 기준이 설날인지 입춘인지 모르니 그 이야기도 사실인지 헛갈리지만 말이다.
이렇듯 나이가 조금이라도 많은 것이 그토록 좋아 보이던 그 시절, 설날 떡국 한 그릇을 비우면 한살을 먹는다는 말에 욕심내 몇 그릇이나 해치우려 한 장면은 만화의 단골 소재였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면 직업에서 손해보기 일쑤라 좀더 성숙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는 이야기도 기억이 새록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람들도, 안티에이징 화장품과 진피층에 고주파를 쐬어 콜라겐 형성을 돕는다는 레이저 광고가 솔깃해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글이 보인다. 댓글로는 젊어 보인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으로 들리기 시작했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나이 든 친구들이 모이면 서로의 건강을 안부로 묻기 시작한 후, 글루코사민과 아르기닌을 거쳐 서리태에서 산수유에 이르는 민간요법을 나누다 보톡스와 안검하수교정의 의술로 주제가 옮겨간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쌓은 것이 부족해 보이기 마련이다.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나이라는 숫자에 부담을 느껴 누군가는 함께하기 주저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나이듦의 서글픔은 세월을 거꾸로 흐르게 만들고 싶은 욕망을 실천에 옮기게 한다. 어릴 적 그렇게 빠른 연생을 놀리던 짓궂던 친구들은 이제 주민등록 앞자리가 조금이라도 나중인 친구를 부러워한다. 정년의 시계가 조금이라도 뒤로 갈 것이니 누구는 태어난 해를 정정하기도 하는 판에 조금이라도 젊은 것이 나쁠 게 없다는 말에 나이듦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돌고 도는 듯하다. 철없던 시절 10년 남짓 놀림을 받았지만 더 긴 50년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살게 되었으니 이제 예전 우리의 개구짐에 너그러운 용서를 구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