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관련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최근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95년 문을 연 이래 줄곧 원장 자리를
맡아왔던 최민 교수가 물러나고 3월부터 심광현 교수가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 90년대 초반 민중미술계의 날카로운 평론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문화이론가를 거쳐 요즘 들어선 영화계와 문화시민운동 분야까지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오고 있다. 현재 영화인회의 정책위원장,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정책위원,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사무처장, 계간 <문화과학> 편집인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불과 보름
전쯤 원장으로 내정돼 이전보다도 훨씬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개교 당시부터 이곳의 핵심업무를 맡아온 그답게 “영상원의 2단계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급작스럽게 취임하게 됐다.
지난 3년간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등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실무적인 진행의 책임을 맡아왔는데, 학교 일이 커지다 보니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어 한다. 나도 힘들다. 어쨌건 학교에서 결재, 관리 업무 등을 책임져야 하므로 밖에서 움직이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최민 전 원장이 물러난 것은 혹시 전주영화제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최 원장은 출범 이후 원장 직위를 세번이나 연임했다. 학교에서도 네번 연임에는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교수들끼리
모여 합의를 했다. 박종원 교수는 휴직 중이고 김소영 교수는 안식년이고…. 결국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전주영화제 파문의 두 주체가 모두 영상원에 재직중이라 분위기가 어수선했겠다.
외부에서는 그렇게 볼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물론 발단의 문제는 있었지만 당사자끼리는 해소된 것으로 안다. 사실 정성일씨가
주로 문제제기를 했고 김소영 교수 입장에서 그쪽 실무팀의 일원으로 ‘난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최민 원장도 위원장이라는
입장이 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갈등이 확산되는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 내부에서는 두분의 사정을 대충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처음에 사태가 벌어졌을 때는 당황하긴 했지만….
참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어떻게 하다보니 두루두루 얽히게 됐다. (웃음) 사실 그 업무들은 내용상 겹치는 부분도 많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그동안은 초기 작업이었으니까
내가 관여해야 했지만 이제는 과도기를 벗어나 다른 사람이 맡을 수 있는 여건이 만들졌다. 이제 좀 역할분담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의 바깥 일들도 모두 영상원과 관계가 있다. 스크린쿼터 문제는 그야말로 영상원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영화인회의도 우리가 영화인을 배출하는 입장이니 당연히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심 원장 개인적으로는 영화와 별 관계없는 경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됐나.서울사대 독어과를 다니던 시절엔 화실을 차려놓고 그림을 그리곤 하며 생활했다. 대학 4학년 때인 78년 가을 한 선배가 이장호 감독의 영화
<갑자기 불꽃처럼>에 연출부로 들어간다며 나에게 함께 작업할 것을 제의했다. 다음해 5월까지 연출부 막내로 일했는데 제작사의 트러블 때문인지
그 영화는 결국 개봉되지 못했다. 영화에 꿈을 품고 군에 복무하던 중 제대 직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맏아들로서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대우의 해외영업부에서 근무하며 해외 공사 수주하는 입찰 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미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막상 학교를 다니다 보니
직장생활이 짐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을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운좋게도 서울미술관 학예실장 자리를 맡게 됐다. 그러다 90년 박광수
감독이 <베를린 리포트>를 만든다고 해서 미술감독으로 합류했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영화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영상원 개교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와 관계를 맺게 됐다.
원장으로서 당면한 영상원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나름의 판단으로는 이제 영상원의 1단계 작업이 끝났다.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 영화산업
현장과의 실질적인 결합이다. 수업에 생생한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함과 동시에 디지털 같은 현장의 새로운 요구를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다. 영화이론과 내부에 기획, 프로듀서, 순수이론 등 세부 전공을 나누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기획에 대한 학생들의 희망이 굉장히
크다. 배운 이론을 현장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수진도 충원해야 한다. 금년에는 받아놓은 티오가 바닥이
나 만화과와 디자인과에서 두 명을 충원하는데 그쳤다. 정말이지 교수가 많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교수는 19명 뿐이다. 많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단과대학이다. 최소한 40명은 필요하다.
일반대학 영화학과에는 영상원이 지나친 특혜를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실기 석박사 학위의 인정 문제도 여전히 남아있고.
그 문제는 전망이 좋은 편이다. 과거 교육부가 문화부와 같은 레벨에서 티격태격할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교육부가 부총리급으로 격상되고 총체적인
인적관리 업무를 맡다보니 오히려 더 전향적인 결론이 날 것 같다. 교육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교육발전과제를 보면,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전문석박사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대학의 자율권을 더 보장하는 쪽으로 제도가 많이 바뀌어서 좀 더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다. 사실 1999년 당시에는 대학개혁의 방향이라든지 하는 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왜 저기만
잘 되냐’는 식의 반발심이 컸던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21세기 형의 새로운 예술가나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느냐 하는 것이다. 또 타 대학도
BK21 등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도 이전과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라 본다.
영화산업과의 산학협동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것인가.
올해 서울시와 한강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졸업생, 재학생, 교수들이 힘을 모아 기획에서부터 최종 완성본까지 끌고갈 계획이다.
앞으로도 그런 형태로 외부와 연계할 생각이다. 특히 프리 프로덕션 컨설팅은 몇군데와 논의 중이다. 현장에서 고정적인 기획 인력을 상주시키면
비용도 나갈 뿐더러 전문성이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단순 기획이 아니라, 조사, 기획에서부터 시나리오에 대한 컨설팅을 거쳐 촬영 콘티까지
일관되게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방송영상과가 신설되는데.
초기부터 만들려고 했는데 여력이 없었다. 우리는 뉴스나 오락 프로그램, 드라마 같은 것을 제작하는 인재를 기르려는 생각은 없다. 교육목표는
다큐멘터리와 교양물에 한정돼 있다. 따라서 필요로 하는 장비의 수준도 그렇게 높지 않다. 특히 매체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그것이 불러일으킬
변화까지 커리큘럼 속에 담으려 한다.
올해 세번째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동안의 성과가 있었다면.
1999년 칸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이인균의 <집행>이 나가는 등 외국 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크랭크인했고 현장에서 시나리오도 많이 쓰고 있다. 또 이론과 출신들은 전주영화제 등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 졸업생 중 한 명도
노는 사람이 없다. 아직 질에 대해 평가할 단계는 아니지만 일단 충무로 진입은 성공적으로 시작했다고 본다.
영상원은 다른 대학 영화학과와 차별성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영상원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재상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국립학교이므로 일종의 의무가 있다. 우리나라 영상분야의 기간인 영화산업이 유지되도록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자유로운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2차적인 임무다. 영화산업이 붕괴되면 자유로운 예술가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미디어센터도
생기고 영화제들도 틀을 잡아갈 텐데 엄청난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이런 데 쓸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낼 것이다.
실무능력 위주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인가.
단순한 실무능력이 아니다. 거시적인 정책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서 미시적 단위를 코디네이션할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이론과 실기, 정책과
산업을 코디하는 능력을 가진 인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유럽이나 할리우드 영화계도 그런 인력이 없었으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수진의 대외활동이 너무 많다는 학생들의 불만이 있다.
출범 당시부터 우리는 다른 학교와 달리 교수진이 현장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야 현장의 변화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수업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려면 교수가 2년에 한번씩은 작업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교수의 절대적인 숫자가 모자라다는 것이다.
때문에 학생에게 부탁하고 당부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교수들이 학교에 붙어 있는 것보다는 현장에 나가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예산의 한계도 있다. NYU처럼 교수가 없어도 보조스탭들로 하여금 기자재 대여, 시설 이용 등을 원활하게 하려면
운영예산이 나와야 하는데 거의 확보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영화계를 보면 산업화 논리가 지배하는 모습이다. 심 원장의 논지에서도 산업화 논리가 어느 정도 묻어나는데.
어느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산업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 영화계의 문제는 상업화는 됐지만 산업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구분돼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 영화계는 산업이 아니다. 표준계약서 하나 없이도 일이 이뤄지는데…. 올해 영화인회의에서 세운 4대 과제인
미디어센터 설치법, 표현의 자유 확대, 지역영상위원회의 전국적 확대, 영화제 지원 정책 제고 등은 이같은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산업화란 결국 공적 인프라의 문제라는 주장 같다.
영화의 산업적 인프라, 문화적 인프라는 공공성을 통해 확보되는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 법 체계가 달라 외양적으로는
시장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공공자원과 지원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영화는 산업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세계 영화사를
훑어봐도 산업적 기반 없이는 자국 영화가 생존할 방도가 없다. 산업을 부정하는 것은 영화를 개인적인 창작작업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 파인아트적인 성격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산업적인 성격과 병행될 때만 존립이 가능하다. 미국이 이 두 가지의
성격을 잘 병립시켜 영상문화 선진국이 된 것 아닌가.
문석 기자 ssoo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