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홍석의 옷에는 ‘허연’ 소금기가 묻어 있었다. 백홍석을 연기하는 손현주의 땀이 묻어 말라버린 자국이었다. “홍석은 지금 씻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빨래까지 하겠어요. 의상팀 친구들에게 실제 이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 많으니까 빨지 말라고 했어요.” 그를 만난 지난 6월25일은 <추적자> 9회 방영을 앞둔 날이었다. 총 16부작 드라마의 절반을 손현주는 백홍석과 함께 땀과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왔다. 옷에 묻은 땀자국이 지금 손현주가 겪는 전쟁을 실감케 했다.
-오늘 인터뷰 장소가 <추적자> 세트라고 해서 의외였다. 백홍석은 주로 밖에서 뛰어다니는 남자 아닌가. =사실 야외촬영이 많다. 길에서 촬영하고 이동해서 또 촬영하고 또 이동하는 식이다. 뛰는 것도 이제 이력이 생겼는지 뛰다보니까 잘 달린다. (웃음) 오늘은 총에 맞은 백홍석이 병원에 있는 장면을 찍는다. 내일(26일) 방송분이다. 스탭, 배우들이 모두 전쟁을 치르고 있다. 다행인 건 어느 때보다 뭉쳐 있다는 거다. 구성원이 뭉쳐 있으면 피곤한 줄 모른다.
-<추적자>에 쏟아지는 관심과 호평 때문이기도 할 거다. =사실 이 정도까지의 관심은 생각을 안 했다. 경쟁작들이 워낙 세다. <빛과 그림자>는 그동안 봐온 시청자가 있고, 공유가 나오는 <빅>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작품이니까. <추적자>의 박경수 작가가 이들 작품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둘지 정말 고민 많았을 거다. <추적자>를 시작할 때, 우리의 바람은 딱 하나였다. 소소하게 천천히 시작하더라도 나중에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거였다.
-<추적자> 이야기는 감정적인 농도나 다루고 있는 소재 면에서 상당히 세다. 드라마에서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을 법한 내용이다. =지난해 가을에 제안을 받았는데, 나도 이게 드라마로 가능할까 싶더라. 건드려서 안되고 피해가야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작가와 연출자에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가능하면 출연하겠냐”고 되묻더라. 오랜만에 대중의 입맛에 ‘간이 맞는 드라마’가 나오겠다 싶었다.
-자연인 손현주의 입장에서 백홍석은 어떤 매력을 가진 남자였나. =백홍석은 개미이고, 모래알이다. 그가 산으로 뛰고, 터널로 도망간다고 한들 권력자들이 볼 때 백홍석의 모습이 얼마나 우습겠나. 그런데 이게 자기들을 툭툭 건드리는 거지. 극중에서 서 회장(박근형)이 그런 말을 한다. “항상 싸움에서 이기던 소가 모기에 물려 죽었다”고. 그런 모기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가 백홍석의 매력이다. 실제 백홍석 같은 사람이 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지 않나.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사실 수만 마리의 개미는 집도 부술 만큼 강하다. 백홍석은 그런 힘을 가진 남자다.
-힘들었겠지만 실제 백홍석이 처한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란 상상도 했을 것 같다. =미쳐버리겠지. 보는 분들이 그래서 더 궁금해할 거다. 백홍석이 시원하게 복수해서 갈증을 풀어주었으면 할 테니까. 사실 내가 봐도 답답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답답한 구조 안에 있는 게 맞다. 내가 백홍석이었다면 결국 살아갈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아내가 죽고, 아이가 죽었는데, 복수를 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런 선택을 하면 안된다. 백홍석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고 흔들리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적자>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 중 하나는 아직 백홍석이 목놓아 울지 않았다는 거다. 딸도 죽고 아내도 죽었는데, 백홍석의 얼굴에 황망한 기색은 있지만 울음은 그 충격에 비해 덜해 보였다. 작가의 설정인가? 배우 본인의 선택이었나. =아내와 딸의 숟가락을 붙들고 우는 장면은 대본에서 “숟가락을 어루만지고 목놓아 운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목놓아 울게 되지가 않더라. 숟가락이 놓인 식탁을 보니까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와서 밥을 먹을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치밀어 올라 그저 꺽꺽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라는 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상에 놓인 숟가락을 보니 예전에 <장밋빛 인생>에서 최진실이 신던 신발이 떠올랐다.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슬퍼하는 장면이었는데, 대본에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신발을 가슴에 품었던 적이 있다. 사실 평소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만지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다. 지금 우리 아버지는 건강히 잘 지내시는데, 한번은 아버지가 쓰시던 양은 밥그릇을 집에 가져온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분이 항상 칼을 갈 때 쓰던 숫돌도 챙겨놨었다. (웃음)
-딸의 사진을 보다가 <클레멘타인>을 부르는 장면을 연기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궁금했다. 이 장면은 마치 아버지 백홍석의 노래가 수술을 받고 있는 딸을 살려내는 것처럼 연출돼 있다. =그 장면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때도 네댓번 불렀는데, 지금도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 울컥한다. 감독의 주문은 투박하게 가자는 거였다. 아무 장치도 없이 사진만 들고서 노래를 부르자고. 나도 잘 불러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냥 담담하게 부르려 했다. 그런데 담담해지지가 않더라. 하지만 그 장면에서도 감정을 다 털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드라마는 배우가 남겨놓은 감정을 시청자가 채운다. 내가 울면 시청자가 울 것이 없지 않겠나.
-딸이 죽고 난 뒤 백홍석은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나선다. 이때 백홍석은 상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그가 입은 상복의 사이즈가 백홍석보다 커 보이더라. 매우 디테일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상복을 준비해놓고 사는 사람은 없지 않나. 장례를 치를 일이 생기면 그때 대여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상복을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몸보다 큰 옷을 입을 수밖에 없다. 아마 내가 아니라 잘생긴 배우들이 했으면 타이트하게 슈트처럼 입는 게 어울렸을 거다. 나는 필요없다고, 원래 그렇게 입는 옷이니까 그대로 가자고 했다. 백홍석에게는 그게 어울렸다.
-극중에서 탈옥한 백홍석을 강동윤이 납치해서 대면하는 장면도 회자되고 있다. =백홍석을 연기하면서 가장 크게 분노했고 슬퍼했던 장면이다. 강동윤이 백홍석에게 말하기를 “용서는 힘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고, 당신은 지금 포기를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나. 현실도 이럴까 싶어 분하더라. 연기를 하는 건데도, 절망스러웠다.
-실제 김상중과도 오랜 친구다. 그 장면을 찍기 전에 나눈 대화가 있었나. =하나만 이야기했다. 내가 “뒷머리를 잡을 거냐, 앞머리를 잡을 거냐”고 물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오는 김상중의 목소리 성대모사) “아무래도 앞머리를 잡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더라. (웃음) 카메라 각도마다 10번 정도 잡힌 것 같다. 연기를 하는 동안 분하기도 했지만, 서글프더라. 친구의 배신까지 알게 되는 장면이니까.
-<추적자>는 전작들과 비교할 때 장르로서나 담고 있는 에너지로서나 매우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선택할 때 배우로서의 바람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대형 스타가 없이도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말하자면 ‘변방이 원방이 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거다. 지금도 연기는 잘하는데, 나이에 밀려서 수면 아래에 있는 배우들이 많다. 그분들이 저평가되는 게 너무 아쉬웠고 속상했다. 한동안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연기하셨던 박근형 선배님도 그렇게 무섭게 연기를 하시지 않나. 물론 드라마에는 스타가 있어야 하고, 그런 드라마를 사람들이 봐줘야 한다. 하지만 <추적자>를 통해 이런 배우들의 드라마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 여기 나오는 배우들이 모두 작심했다.
-이제는 조금은 다른 색깔의 캐릭터에 대한 욕심도 나지 않나. =있다고 해도 배우가 드라마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선택을 받아야 하는 거지. 나름 의지가 있다면, <추적자>를 끝낸 뒤에는 강동윤 같은 남자를 연기하고 싶다. 내가 강동윤을 했다면 어땠을까? 사람 괴롭히는 깡패 말고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을 해보고 싶다. 악역이 안되면 <앞집 여자> 같은 코미디를 하고 싶다. 최근에 출연한 작품들을 돌아보면 너무 무겁고 진중했던 게 아닌가 싶더라.
-배우 생활 초반부터 “서민 냄새가 나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해왔고, 그렇게 해왔다. 아쉬움을 느낀 적은 없었나. =없다. 손현주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소시민이고 동네 아저씨다. 그리고 실제의 손현주도 그런 사람이다. 불만을 느낄 이유가 없다. <추적자>가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다른 생각을 품을 이유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는 틀림없이 이상한 욕심이 생긴다. 그때 엉뚱한 방향이 설정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남자배우들은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를 롤모델로 꼽았다. 하지만 손현주라는 배우는 과거에도 그러한 카리스마의 화신을 꿈꾸지 않았다. 그때는 어떤 롤모델을 갖고 있었나. =할리우드 배우로 보자면 모건 프리먼 같은 사람?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보이지 않나. 내가 존경하는 선배님들도 그런 에너지를 가진 분들이다. 연극에서 처음 TV로 와서도 주로 어른들과 함께 연기를 했다. 주현 선배님이나 오지명 선배님처럼 내가 쳐다볼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까 간이 맞는 드라마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드라마의 간을 맞추는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그건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으로서의 배우를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배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다. =배우는 자체 발광하는 게 아니다.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빛나는 거다. 손현주도 시청자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매니지먼트사들이 많다 보니 젊은 배우들에게 지름길을 너무 잘 알려준다. 정상에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은 알려주는데, 내려오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 거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라는 건 등산으로 볼 때 등정주의가 아니라 등로주의다. 얼마나 빨리 갈 것이냐보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올라갈 것인가, 내려갈 때도 어떤 길을 어떤 순서로 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씨네21> SNS(미투데이, 페이스북)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연기할 때 그 역에 어떻게 집중하는지…. 그리고 그런 집중력은 어떻게 유지하는지 궁금해요~~~. _양은진(페이스북) =백홍석은 딸을 잃은 아버지인데, 사실 내가 수정이를 연기한 친구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았어요. 그래서 촬영할 때만이라고 눈 좀 맞추고 있자고 했죠. 정말 귀엽고 맑은 친구예요. 그런 진짜 감정이 안 잡힐 때는 <클레멘타인>을 네댓번 불러요. 그러면 또 수정이라는 딸을 그리워하는 백홍석에 가까워져요. 사실 감정을 유지하려고 최근에는 이런 인터뷰도 잘 안 하고 있었어요. (웃음)
-이렇게 한치 앞을 모르는 드라마는 처음입니다! 진짜 잘 어울리는 역할인데,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게 있나요? 요즘 주변 반응이 어떤가요. _까멜리앙(미투데이) =선배와 후배님들의 전화와 문자가 많아요. 박원숙 선배님은 한번 장문의 문자를 보내셨어요. “네가 그렇게 진심으로 우니까 내가 가슴이 아프다”고. 사실 박원숙 선배님은 지금 <빛과 그림자>를 하고 계시잖아요? (웃음) 장혁 같은 후배도 촬영장 근처를 지날 때 응원차 방문해주고. 다른 방송사의 PD와 작가들도 응원해주고 있어요. 정말 이분들이 <추적자>에 깊이 들어와 있구나, 그만큼 앞으로도 설렁설렁 가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요.
-작품에 들어가지 않는 쉬는 기간엔 어떻게 지내는지, 평소 모습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요즘 관심있는 취미나 활동이 있다면요. ㅎㅎ _빵이(미투데이) =산에 가는 거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거 좋아해요. 혼자 하기보다는 일반인 동호회분들과 함께하죠. 골프는 잘 못 치는데, 누가 물으면 친다고 그래요. 못 친다고 하면 배우가 골프도 못 치냐고 할까봐.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