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영화배우 하지원’이라고 부르자 하지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응답했다. “‘영화배우’는 정말 멋있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런 말을 들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주인공을 하고 연말 연기대상에 최우수상 후보로 오르는 것이 아직도 꿈 같아요. 제 주위 분이 예전에 그런 말도 하셨어요. 넌 스타성이 없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앉자마자 웃으면서 “이거 드실래요?” 하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드는 그에게는 살갑고 평범한 인상이 지배적이다. “아직 내 연기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고백도 솔직한 만큼 수긍되는 부분이 있다. 사실 <폰>과 <색즉시공>의 흥행은 주연배우 하지원의 몫이라고 보기 어렵고, 지금 수준의 관심과 주목은 드라마 <다모>가 만들어낸 것이다.
<다모>의 ‘채옥’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남자 주인을 모시는 몸종 채옥은 연인의 사랑에 기대기보다 혼자 땅을 딛고 서겠다는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고, 거침없이 휘두르는 칼놀림은 그 의지의 상징이었다(혹자는 이를 연기한 하지원을 두고 “액션이 어울리는 드문 여배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건조하지만 그래서 더 연약했던 여인이고, 슬퍼도 깊은 절망에 휘둘리지 않는 차분함을 가진 캐릭터였다.
그와 반대로 웃음이 많은 하지원은 기본적으로 밝다.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니까 크게 우울할 일이 없다. 너무 목이 말라서 회식 자리에 놓인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니까 한 PD가 그러더란다. 맥주를 저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러다가도 차 타고 창 밖을 이렇게 내다보고 있으면 괜히 슬퍼지고 그래요”라면서 또 웃는다.
매니지먼트사의 제안을 받고 엄마와 상의 끝에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하지원은 “연극영화과에 붙어오라”는 소속사 말에 시험을 쳤다. 친구들이 “너 정말 연기자할 거냐”고 못 미더워 묻던 그때 그는 교수들 앞에서 열심히 돌고래 마임을 했다. 돌고래 쇼를 하다가 먹이를 받아먹고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정신없이 돌고래 흉내를 내고 있는데 한 심사위원이 대뜸 물었다. “학생, 연기는 해봤나?” “아니오.” 그렇게 세 군데에 지원해서 기특하게도 모두 합격했다.
데뷔 초에 “주위에서 너는 안 된다더라”는 말을 듣고, 소속 사무실에서 스타성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온 배우. 그런 배우에게는 범접 못할 아우라보다 남들이 다가서기 쉬운 태도가 훨씬 유익한 장점이 돼줄 것이다. 쉽게 웃고 사소한 데 즐거워할 줄 아는 성격도 큰 보탬이 되리라. 그 태도나 성격에 비해 평범치 않은 역할에서 인상을 남긴 그는 먼 미래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말하지 않는다. “여배우로서 저는 앞으로 3년, 길어야 5년이래요. 이 생활에 대해 안 좋은 얘기도 다 알고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잘 생각 안 해요. 그냥 지금 즐겁게 일하는 게 좋아요.”
그 즐거움은, <내 사랑 싸가지>에서 싸가지 없는 남자에게 불쌍할 정도로 심신을 혹사당하는 고3 여고생 ‘강하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영은 싸가지 없는 ‘주인’에게 지지 않고 맞대응할 만큼 강단있고 솔직하다. 그리고 하지원은 자신이 가진 연기기술보다 “상대배우와의 눈맞춤과 그 속에서 끌어내어지는 감정”에 충실해 이 인물을 연기한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또래 감독과 상대배우를 만나 작업한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쏟아지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쓰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것이 하지원이라는 배우가 자기 존재를 보이는 방식인 것 같다. <다모>에서 무너질 듯한 마음을 강하게 추스르는 채옥으로 시선을 끈 그가 정반대의 지점에서도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건, 아직 고정되지 않은 틀 속에 진심이 움직이고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