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금이가 일군 세계는 도래지 같다. 1984년 동화 <영구랑 흑구랑>으로 등단한 이래 지금껏, 그의 독자들은 철새처럼 돌아온다. 어른이 되어, 부모가 되어, 교사가 되어, 때로는 아직 자기 안에 사는 아이를 데리고서.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너도 하늘말나리야> <유진과 유진> 등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대표작부터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알로하, 나의 엄마들> <슬픔의 틈새>로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을 매듭짓기까지 그도 “가슴속에 남아 있는 어린 나를 위해서” 써왔다고 말한다. 그 덕에 외국에서 고독을 누려보고 싶다는 오랜 꿈과도 가까워졌다. 2024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가 된 그는 4월부터 6월까지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레지던시에 머문다. 하늘길에 오르기 전에 만난 이금이 작가와 지난 40년의 발자취를 되감아보았다.
- 생애 첫 해외여행도 문학 덕에 이뤄진 걸로 안다. 1999년 출간한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성공 후 출판사에서 포상 차원으로 볼로냐 도서전에 보내줬다고.
우리 때는 해외여행이 흔치 않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여력도 없었다. 마흔살에 처음 유럽에 가니 꿈만 같더라! 도서전은 딱 하루 관람했고, 남프랑스를 여행했다. 그 이후 해외여행에 대한 꿈이 커져 꾸준히 다니려 했다. 나는 글 쓸 때와 여행할 때만 계획적이다. 고생스럽더라도 즐겁다. 딱 그 두 가지 일에 한해서만. (웃음)
- 친구와의 여행기를 엮은 <페르마타, 이탈리아>에도 그 성향이 묻어나더라. 작법서를 내거나 공저로 산문을 보탠 적은 있어도 단행본으로 에세이를 발표한 건 데뷔 38년 만에 처음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도 수필을 써서 상 타본 적이 없다. 내가 경험한 걸 그대로 쓰기보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편을 늘 더 재밌어했다. 내 삶은 이미 소설로 다 얘기했다. 다만 여행에는 플롯을 짤 수 있는 좌충우돌이 있다. 잘 써내면 독자에게 한편의 문학처럼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 시점 전후로 동화와 청소년 소설 20여권을 전면 개정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구체적인 계기를 묻고 싶다.
나와 함께하는 편집자들이 점점 젊어진다. 내가 쓴 관습적인 표현이 혐오나 차별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예전 작품들 생각이 났다. 내가 어른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았을 테다. 하지만 어린이, 청소년 독자들에게 “옛날엔 그랬으니까 이해하고 읽어주세요”라고 하기에는 부끄럽다. 과거의 문체와 어휘를 더 예민하게 다듬고 싶어 개정을 결심했다.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꾸는 식으로 하나씩 집어냈다. <밤티 마을> 시리즈, <너도 하늘말나리야> 시리즈, <유진과 유진>처럼 지금도 많이 읽히는 책 위주로 시작했다. 신작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개정에 쏟고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금이라는 인간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유아차의 예시처럼, 새로 알아차려 다행스러운 지점이 있다면.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부터 가져왔고, 나도 여성이기에 조심해온 데 반해 알게 모르게 남자아이들을 일반화해온 게 눈에 보이더라. 남자아이들은 단순하다고, 게임만 좋아한다고 무심하게 묘사해온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전체를 놓고 보면 남성에 대한 대상화가 여성에 대한 대상화에 비해 적겠지만, 다음에 남자아이들을 그릴 때 좀더 신경 쓰기로 다짐했다.
- 글을 고칠 때면 처음 쓸 당시의 나를 마주해야 한다. 가장 오래 들여다본 작품은 무엇인가.
<유진과 유진>. 사실 그 이야기는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성추행을 겪은 뒤 썼다. 학교에서는 사건을 조용히 묻길 바랐고, 경찰은 범인을 직접 잡아오라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국여성의전화에 연락했는데, 거기서 말하길 부모가 아이에게 과도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아이를 평소처럼 대하되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이라더라. 그대로 하면서 남편과 범인을 잡았다. 그는 동종 범죄로 집행유예에 처해 있던 자라 바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아이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대도 사춘기 때 트라우마로 되살아나면 어쩌나 싶었다. 아이가 나중에 힘들어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 내 사랑을 보여주고자 <유진과 유진>을 썼다. 그러나 이 얘기를 밝히기 두려웠다. 화제가 돼서 딸이 주목받으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비슷한 일을 겪은 아이들이나 그 부모들이 메일을 보내오면 참으로 찔렸다. 우리 아이는 잘 극복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답장했다면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다. 그러다 개정 작업을 하면서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야 용기를 냈다. 딸 덕분이다. 엄마는 아동청소년문학을 하는 사람이니 나처럼 극복한 아이의 서사를 더 자주 얘기해야 한다더라. 그 후 윤가은 감독이 <유진과 유진>을 드라마화하고 싶어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세계의 주인>으로 이야기를 확장했다. 내가 쓴 작품에서 한발 더 나아간 영화라 인상 깊었다.
- <싫어요 몰라요 그냥요> 개정판 머리말에는 노 키즈 존에 대한 우려를 적었고, 근작 <너를 위한 B컷>에는 중학생 유튜버와 그 편집자를 등장시켰다. 예순을 넘긴 작가로서 어린이, 청소년을 둘러싼 문화를 따라잡기 버거울 때도 있을까.
<너를 위한 B컷>을 쓰기 전까지는 유튜브를 멀리했는데, 신문을 보니 아이들의 장래희망으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참 많이 언급되더라.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그 직업을 너무 모르는 것도 문제이니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도 <너를 위한 B컷>은 결국 ‘편집’에 대한 이야기다. 물리적으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이들 유행어나 문화를 금방금방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트렌드도 소설 속 장치에 불과하다. 내가 정말로 그리고 싶은 건 아이들의 마음과 관계다. 독자들도 작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 유행을 모른다고 뭐라 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웃음)
- ‘똥손’, ‘오지라퍼’ 같은 단어도 문장에 녹이는 걸 보면 신조어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듯하다.
사양될 수 있는 언어를 쓰는 게 걱정스럽긴 하다. 다만 일부러 시간성을 드러내고 싶을 때도 있다. 이번에 <유진과 유진>을 고치면서도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를 일부러 추가했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의 모습이 어린 독자들에게 ‘옛날이야기’로 다가가길 바라서.
-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이야말로 옛이야기를 다시 쓰는 작업이었다. 4·16재단이 펴내는 <월간 십육일> 2025년 12월호에 세월호 참사 이후 역사소설 집필에 착수한 까닭을 터놓았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드넓은 벌판을 누비는 꿈을 꿔왔다. 나도 작가가 되면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쓸 줄 알았으나 어린이와 청소년의 현실을 주로 다루다 보니 공간이 협소해지더라. 그에 대한 갑갑함을 오래 느껴왔기에 타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구상해왔지만 엄두가 안 났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내가 지겨워하는 일상을 영원히 잃어버린 아이들을 생각하니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내 소설에 등장시킬 자신이 없어지더라. 내가 역사소설에 도전했다고들 하지만 실은 청소년 소설로부터 도피한 것이기도 하다. 10주기에 에세이를 청탁받고서야 고백할 수 있었다.
- <밤티 마을> 시리즈, <너도 하늘말나리야> 시리즈처럼 여성 디아스포라 서사도 3부작이 되었다. 긴 시간을 들여 세계관을 넓히는 일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을 쓰고 처음으로 팬레터를 받았다. 속편을 쓸 계획은 없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엔딩과 어린이들이 생각하는 엔딩의 개념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웃음) 아이들의 원성을 들으며 나 또한 인물들이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해졌다. 지금도 ‘이거 써주세요, 저거 써주세요’ 하는 요청을 자주 듣는다. 그로 인한 호기심과 독자를 향한 고마움, 때로는 인물에 대한 미안함이 후속작을 쓰게 만든다. 인물이 살고 있는 내 마음속 방이 여럿인데, 그 안이 70%에서 80%까지 차올랐을 때부터 문장을 이어나간다. 스웨덴에 머무는 동안에는 해외 입양으로 떨어져 산 자매의 이야기를 그려보려고 한다. 그곳만의 날씨와 정서로부터 영감을 받고 싶다.
내 소설에 스며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감독 이누도 잇신, 2004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는 조제(이케와키 지즈루)를 떠날 때 무릎을 꺾어가며 운다. 그 심경에 이입해 소설집 <벼랑>에 실린 단편 <생 레미에서, 희수>를 쓴 기억이 있다. 나와 달리 살아온, 앞으로도 다르게 살아갈 누군가를 바라보는 인물의 마음을 미술이라는 소재를 매개로 풀어냈다.”
<칠드런스 트레인> 감독 크리스티나 코멘치니, 2024
“1940년대 이탈리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아이가 결연 가족과 함께 겨울을 나기 위해 북쪽으로 떠난다. 새로운 가정에서 사랑받고, 음악적 재능까지 발견하며 친모 곁을 떠나기로 한 아이의 감정을 떠올리며 <슬픔의 틈새> 속 용재의 이야기를 썼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 미처 모르는 감정을 쓰려고 할 때 영화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기차의 꿈> 감독 클린트 벤틀리, 2025
“미국사라는 배경을 관통해 한 인간의 생애를 그린 <기차의 꿈>은 내가 추구하는 문학적 방향성을 지녔다. 또한 영화는 첫 장면부터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어린이, 청소년 독자들을 위한 책도 그래야 한다. 아이들에게 지루한 초반부를 참아달라고 부탁하기엔 미안하니까! 이렇게 영화를 보며 첫머리를 어떻게 시작할지, 플롯을 어떻게 짤지 고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