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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0에서 1이 아닌 0으로 돌아가는, <8번 출구> 니노미야 가즈나리
이우빈 사진 백종헌 2025-10-21

- 가와무라 겐키 감독에게 <8번 출구>의 기획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주 묘했다. (웃음) 원작 게임을 잘 알고 있었고, 게임에 별다른 이야기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기 기획 땐 캐스팅된 배우가 나밖에 없었다. ‘이거 정말 괜찮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웃음) 하지만 감독님이 각본 집필 단계부터 함께해주셨고, 이 과정에서 감독님의 계획을 들으며 안심하게 됐다.

- 시나리오나 캐릭터 설정에 관해 많은 의견을 제안했다고 들었다. 예를 들어 ‘헤매는 남자’가 일상에서는 굉장히 지쳐 보이지만 막상 지하도에 갇히고 나서는 점점 얼굴에 생기가 돌게 된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제시했다고.

보통의 영화제작 과정보다 아주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 제작진도 참여했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다음 촬영에 대한 피드백을 나누고 연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의견을 당일 밤에 감독님이 정리하고, 아침에 촬영이 시작되면 우리의 의견을 반영한 플롯을 공유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론 누구의 의견이 어떻게 적용됐는지 하나하나 따지기가 어려울 정도가 됐다. 나중에 감독님이 현장이나 인터뷰 자리에서 “아, 이건 니노미야의 의견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아! 내가 그런 것도 말했지’라고 생각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웃음)

- 연기의 난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을 것 같다. 대부분의 분량을 혼자 소화해야 하고, 공간도 무척 한정되어 있으니.

그렇다. 이렇게 한정된 환경에서 홀로 연기하게 되면 아무래도 연극적인 톤으로 과장된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지하도의 이상 현상을 발견할 때 평소 연기보다 더 크게 놀란다든지, 무서운 소리가 들릴 때 뒤를 더 빠르고 큰 동작으로 돌아본다든지 하는 본능이 생기기 마련이다. 다만 감독님의 주문은 확실했다. “소금과 후추의 맛”만 날 정도로 기본적인 연기를 보여달란 디렉팅을 주셨다. 관객이 마치 게임 속 캐릭터를 보는 것처럼, 이 세계관에 직접 몰입할 수 있도록 담백한 연기를 펼쳐달란 뜻이었다. 그래서 속으로도 계속 ‘괜한 것은 하지 말자. 저걸 만지고 싶어도 만지지 말자!’라고 되새겼고, 더 냉정한 연기를 할 수 있었다. 감독님이 현장에서 촬영이나 연기를 재촉하는 성격이 아닌 덕에 편안한 환경이 조성된 덕도 컸다. 이런 연기 방식이 일본에선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서 결과적으론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한국 관객들도 좋게 봐주실지 조금 떨리고 기대도 된다.

- 안 그래도 헤매는 남자의 침착함이 유독 돋보인단 느낌을 받았다. 상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이상 현상을 마주했을 때, 일반인이라면 당황하고 상황을 부정할 법도 한데 헤매는 남자는 아주 침착하게 게임의 규칙을 눈치채고 이상 현상을 발견한다.

만약 처음부터 강도가 센 감정을 보여주게 된다면 관객들을 극에 억지로 끌고 올 순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세계의 법칙과 이상 현상에 대해 직접 알려주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다. 다만 관객들의 능동성을 최대한 확보해주고 싶었다. 헤매는 남자가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서 멈추는 그 순간, 관객들도 이 세계의 원리를 직접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또한 후반부까지 이어질 인물의 감정선을 조절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후반부에 이르면 전화기에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헤매는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는 때가 온다. 그때서야 강한 감정 연기를 보여줬다. 만약 그 이전에도 헤매는 남자가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연극적으로 표현했다면 전화기 장면의 울림은 덜했을 것이다.

- 그래도 중간엔 다른 인물들과 연기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꽤 반가웠을 것 같은데.

나도 처음엔 혼자 연기하는 게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촬영을 시작하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됐다. 혼자인 것도 꽤 편하더라. (웃음) 스스로 정한 타이밍에 재량껏 말하고 움직이면 되니까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구현하기가 무척 수월했다. 이번 기회가 되어서야 ‘아, 내가 혼자 연기하는 걸 편하게 여기는 유형이구나!’라고 깨달았다. 반대로 말하면 타인과 연기를 나눈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다시금 깨우친 계기였다. 상대 배우는 기계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정확히 말하거나 움직여주지도 않고,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알 길도 없다. 그래서 항상 상대의 얼굴과 소리, 마음을 주시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뒷부분에 등장하는 소년과의 관계에 있어선 ‘무언가 서로에 대해 깨달아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론 보여주지 말자’라는 의견을 모았다. 예를 들어 “우리 같이 힘을 합쳐서 여기서 빠져나가보자!” 같은 극적 순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감정선의 전반적인 조절처럼 이 둘의 관계 역시 후반부의 특정 장면에 들어서야 여운을 느끼게 하는 방식을 택하고 싶었다.

- 언급한 것처럼 <8번 출구>는 기본적으로 공포 장르물이지만 한 남자의 성장드라마, 가족드라마로 보이기도 한다. 배우로선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나.

질문처럼 <8번 출구>는 결국 인간에 대한, 성장을 말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따로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0에서 1로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경험을 통해 0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란 점이다. 무조건 ‘앞으로 한발 내딛자’라고 외치는 뉘앙스가 아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라거나, 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보단 ‘이제 당신은 처음, 0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이제부터 원하는 길을 찾아도 된다’라고 속삭여주는 쪽에 가깝다. 이러한 여백이 <8번 출구>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 0으로 돌아간다는 영화의 의미가 <8번 출구>속 게임의 규칙, 그리고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이 이어지는 맥락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맞다. 심지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잘라내고 중간 부분만 계속 반복되고 루프하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웃음) 실제 촬영 방식도 루프의 과정에 가까웠다. 첫날에 오프닝 시퀀스를 찍고 나서 감독님에게 오늘 엔딩 시퀀스까지 촬영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시작과 끝이 이어져야 하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결국엔 엔딩 장면을 세번이나 찍게 됐다. (웃음) 촬영 중에 각본이 바뀌고 촬영본을 편집하다 보니 결말의 가짓수가 무수히 많아졌다. 촬영마다 달라지는 헤매는 남자의 경험에 따라 결말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과적으론 마지막에 찍은 엔딩 장면을 사용하게 됐다. 유연한 제작 과정 덕분에 이뤄진 결과물이다. 어쩌면 이렇게 실시간적인 선택을 조합하며 이야기의 최종을 만들었단 점에서 영화에 참가한 모두가 <8번 출구>속의 게임을 진행한 것 같다는 일체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와 제작진뿐 아니라 관객들도 <8번 출구>의 헤매는 남자가 되어 각자의 최종 선택을 찾아가길 바란다.

- 내년에 그룹 아라시의 컴백도 계획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가수로서, 배우로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아라시 활동을 꽤 오래 쉬었던 만큼 기다려주신 팬들을 얼른 만나고 싶다. 또 한편으론 다른 네명의 멤버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내가 구경하고 싶단 욕심도 크다. (웃음) 아라시와 관련해선 마지막의 마지막, 그리고 또 마지막까지 좋은 시간을 남기자는 것을 인생 과제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배우로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방향성도 있다. 감독님이나 제작자들이 “너를 통해 이 인물을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지게끔 연기를 해나가는 것이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나 캐릭터, 취향은 분명히 있다. 다만 배우로서 가장 기쁠 때는 “네가 나오는 이 작품을 보고 싶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많은 분이 내가 진심으로 내뿜은 표현을 전해받았다고 느껴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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