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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오늘은 무수한 어제로 이뤄져 있다, <미지의 서울> 박보영 인터뷰 ➁
이자연 사진 최성열 2025-07-15

- 박보영 배우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과속스캔들> 정남이가 아빠 현수(차태현)를 원망할 때에도, <늑대소년>에서 철수(송중기)를 억지로 보낼 때에도 박보영 배우가 울기 시작하면 관객은 하릴없이 백기를 들게 돼요. 왜 우리는 박보영이 울면 스르륵 함께 울게 될까요.

제가 많은 슬픔을 경험해봐서 그런 것 같아요. 제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은 저를 두고 “너 생각보다 많은 일을 겪었구나”라고 해요. 인생의 굴곡도 많고 살면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도 많이 겪었어요. 울다가 숨을 못 쉴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요. 그런데 제 성향상 슬픔이 찾아오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좋은 것으로 빨리 덮으려 하기보다 오롯이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슬픔을 받아들이는 데 저항력이 별로 없어요. 바닥을 치고 마음을 비운 상태가 되면 다시 올라갈 수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제가 하는 일에도 은연중에 묻어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미지의 서울> 속 인물들은 모두가 엄마 앞에서 어린아이가 돼요. 남들과 있을 땐 정의롭고 똑똑한 호수도 분홍 앞에선 틱틱거리고요. 월순 앞에서 옥희도 아이처럼 울죠. 미지 또한 옥희에게 울며불며 이야기합니다. 배우 박보영은 어떤가요. 언제 엄마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나요.

엄마 아빠 앞에 서면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집에 가면 뭘 안 하게 돼요.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저도 모르게 엄마 이거 해줘, 아빠 이거 해줘 하게 되고요. 그런데 부모님도 그래요. 데뷔한 지 벌써 20년이 다 돼가는데 촬영장에 밥은 나오는지 잠은 좀 잤는지 계속 물어보세요. 비오는 날이면 촬영 어떻게 하냐고 물으시고요. 세트장에서 촬영하는데. (웃음) “세트장은 비 안 와”라고 하면 그제야 안심하시죠. 저도 미지와 옥희처럼 엄마와 싸운 날들이 있어요. 엄마가 눈물을 보이는 순간 서운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엄마를 달래게 되더라고요. 미지와 옥희가 싸우던 장면이 그래서 저에게 크게 다가왔어요. 그때 옥희가 주저앉는 건 대본에 없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자동으로 엄마에게 다가가 안게 되더라고요. 딸들은 엄마의 눈물에 약하잖아요. <미지의 서울>은 대사 자체가 위안을 주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무척 현실적이에요. 도대체 이강 작가님은 어떻게 이렇게 일상적인 부분들을 캐치하시는 건지!

- 숨 막히는 미래의 한국금융관리공사 사무실에 직접 들어가본 기분은 어땠나요.

감독님이 사무실 구조를 현실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배치하셨지만 실제로 파티션이 낮아서 뒤에 있는 상사가 앞에 있는 직원들의 모니터를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미래의 사무실은 철저한 칼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더욱 숨 막히게 느껴지죠. 저도 촬영하러 들어갈 때마다 숨 막힌다고 계속 말했어요. 배우들끼리도 “이런 환경의 회사 다닐 수 있어?”라고 서로 장난처럼 묻기도 하고요. (웃음) 그런데 이런 사무실 분위기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 <미지의 서울>에 담긴 파격적인 선택에 대해 또 말해보고 싶어요. 서울로 떠나지 않고 살던 동네에 남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샛노란 머리의 여자애. 미지의 첫 모습은 전형적인 아웃캐스트 이미지를 넘어 불량해 보이기도 합니다.

탈색 컬러는 시안도 엄청 많았어요. 그러다 감독님이 두 가지를 강조하셨는데요. 먼저 고급스러운 헤어숍에서 한 듯한 탈색 스타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두 번째로는 머리가 좀 자라서 뿌리 색깔이 드러난 상태였으면 좋겠다. 미지의 성격과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거죠. 그래서 저는 너무 다행히도 (머리를 감싸안으며) 제 두피를 보호할 수 있었어요! 1화에서 미지가 찌뿌둥하게 일어나면서 처음 등장하는데요. 그때 살짝 주근깨가 보여요. 날것 그대로의 미지의 상태를 드러내는 거죠. 스타일링에서도 다양한 색깔을 한번에 착용하는 반면 미래는 거의 색이 없어요. 무채색이죠. 딱 떨어지는 정장이 다고요. 둘이 남 몰래 바꿔 지낼 때에도 각자가 갖고 있는 옷 중에서 그나마 입을 만한 것을 선택하죠. 디테일을 너무 신경 쓰다 보니 하루는 감독님이 “이건 아무리 그래도 미래가 가방이 없으면 없었지 죽어도 안 들 거 같은데?” 이런 말을 하신 적도 있어요.(웃음)

우리의 오늘은 무수한 어제로 이뤄져 있다

-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그리던 시기를 지나 언젠가부터 사회와 맞닿은 이야기를 많이 찾았어요. 결핍과 상처, 연결과 온기를 전달하는 얼굴이 되었죠.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왠지 더 작아져요. 제가 뭐라고! (웃음) 직업으로서 배우의 가장 큰 장점은 매번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거예요. 너무 잠깐 살아봐서 모든 걸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기만의 상처를 가진 분들에게 당신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여기 또 있다고 계속해서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면 적어도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고 싶어요. <미지의 서울>도 그렇죠.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인물은 없어요. 그게 너무 아늑해요.

-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은둔형 외톨이가 무려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사회적으로 바깥생활을 어려워하는 친구들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렵게 방 밖을 나온 미지가 그분들에게 용기를 주면 좋겠어요. 문지방을 넘어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는 용기요.

-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조명가게> <멜로무비> 등 최근작은 실시간 반응을 통해 동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기다려왔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슬픔을 지니고 있는지 다층적으로 이해하게 도와주죠.

사실 저 혼자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요. 작품들을 한편씩 거치고 나면 그런 걸 깨달아요. 좋은 드라마를 통해 좋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걸요. 많은 이들을 위로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 그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 하는 제작사, 그런 작품을 이끌고 싶은 연출자, 그 이야기에 생명력을 담고 싶은 배우들.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채널까지 드라마 한편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바라보면 결국 많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거기서 세상의 희망을 느껴요.

-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통해 우울감을 형상화했던 경험이 <미지의 서울>의 응어리를 표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을 것 같아요. 레이어를 쌓아가는 과정이 연기의 교집합을 연결하기도 하나요.

그럼요. 한번 경험해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큰 차이가 있다고 느껴요. 그간 했던 작품들이 사람의 관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경험이 쌓이면서 더 깊어진 것 같아요. 다만 비슷한 연기로 느껴진다면 이제는 다른 방향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 사람들이 배우 박보영의 필모그래피를 두고 시기별로 단계를 말하잖아요. 작품 경향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요. 혹시 그렇게 명명되는 게 마치 그 자리에 정지한 느낌이 드나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제가 거기에 머물러 있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요즘엔 또다시 밝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잘 왔다 갔다 해봐야죠. (웃음) 제가 데뷔 20주년이래요. 매번 열심히 한다고 해도 뭔가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미지의 서울>이 딱 저에게 지난 시간 동안 잘해왔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앞으로 20년을 또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 올해 손꼽히게 들썩였던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도 깜짝 방문했다죠.

프랑스 일정 때문에 못 갈 줄 알았는데 너무 행운이다 싶게 마지막 날 후다닥 갈 수 있었어요. 귀국하자마자 다음날 바로 달려간 거예요. 박정민 배우의 도움으로 입장했는데 출판사 무제가 워낙 바빠서 정작 얼굴은 3초 정도 봤어요. (웃음) 제가 또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너무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런데 권성민 PD님이 사인회를 하고 계셨어요. 이전에 <톡이나 할까>를 계기로 엄태화 감독님이랑 셋이 식사한 적 있는데 그때 책 선물을 해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이때다 싶어서 책을 바로 사서 사인 줄에 섰죠. 권성민 PD님도 놀라서 눈이 띠용 하시더라고요.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겹치는 순간이 진짜 행복하잖아요. 도서전 자체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마케터님들이 책 설명을 해주실 때 귀가 이~만해져가지고 그냥 다 쓸어왔어요. (웃음)

보영’s pick! 박보영이 꼽은 필모그래피

1. 어쩐지 달달함에 잇몸 만개하고 싶다면 <힘쎈여자 도봉순>

<힘쎈여자 도봉순>

“아무래도 <힘쎈여자 도봉순>이요. 민혁(박형식)이와 봉순이가 정말 만만치 않게 달달하거든요. 민민이라는 애칭도 부르고요… 와, 진짜 나 용감했다. (웃음)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장난 아니거든요. 가끔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몰아보기가 뜨면 저도 그냥 보게 돼요. 재밌더라고요.”

2. 딱 한통의 편지를 써야 한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명화요. 제가 그간 맡았던 캐릭터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외로운 인물이었어요. 자기 편이 없다고 생각할 것만 같아서 힘을 실어주기 위해 편지를 쓰고 싶어요.”

3. 어쩐지 마음이 슬퍼지는 날 만날 수 있다면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슬픔을 잊게 할 친구를 만날 것인가, 완전히 슬픔에 젖게 할 친구를 만날 것인가….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도라희요. 라희 진짜 쉽지 않거든요. (웃음) ‘요즘 재미있는 소식 없어?’ 하면서 찔러보고 싶어요. 지금쯤이면 라희도 데스크에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더 재미있는 소식 많이 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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