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지의 서울>이 공개된 첫주, 1인2역의 차이를 미세하게 드러내는 배우 박보영의 연기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어요. 팬덤 소통 플랫폼 ‘버블’에서 “얼떨떨하다”는 반응을 전하기도 했죠.
<미지의 서울>이 두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에너지가 두배 들긴 했지만 늘 작품에 임하던 대로 최선을 쏟아낸 건 변함이 없어요. 제가 늘 해오던 방식대로 한 거죠. 그런데 드라마가 공개되자 주변 반응이나 온도가 평소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정말 얼떨떨했어요. 첫 방영 이후 <미지의 서울>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내심 다행이었지만 아직 첫주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라 이 분위기가 앞으로도 이어질지 계속 걱정이 됐어요.
알 수 없어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
-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하고도 여전히 불안해했군요.
워낙 걱정이 많은 편이에요. 앞으로 미지와 미래가 서로의 삶을 바꾸는 큰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혹시 이들이 구별되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했어요. 끝까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겠더라고요. 마지막 회 방영일까지도 그랬어요.
- 처음 <미지의 서울> 대본을 받고서 1년을 기다렸다고요. 대본의 어떤 점에 그렇게 마음을 빼앗겼나요.
글로 쓰여진 <미지의 서울>은 따뜻한 소설 같았어요. 각 인물이 살아 숨 쉬고 이들이 말하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울림이 있더라고요. ‘뭐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움직이지?’ ‘이 위로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생겨나면서 제가 꼭 하고 싶었어요. 물론 걱정도 됐어요. 대본만 봐도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눈에 보이잖아요. 그렇지만 이 작품을 원하는 제 마음이 그 두려움을 넘어섰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좋은 작품을 만나도 크게 질투한 적 없었어요. 각자의 트랙을 나아가는 거니까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연기한 <미지의 서울>을 상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웃음) 이건 놓칠 수 없다. 어떻게든 기다리자. 그렇게 기다렸어요. 감독님도 정해지기 전이었거든요. 오직 저랑 책. 딱 둘만 남아서 사람들이 와주길 기다렸어요.
- 이강 작가와 박신우 감독 모두 <미지의 서울>로 처음 만났어요. 두 사람과 함께 나아가는 과정은 어땠나요.
이강 작가님은 정말 여리고 소녀 같으세요. 현장에 놀러오시면 소리도 안 나는 모니터를 하루 종일 보고 가세요. 언젠가 추운 날에도 내내 보시길래 제가 “소리도 안 들리는 걸 왜 이렇게 오래 보세요” 하고 여쭸더니 작가님이 “제가 쓴 거라 그런가, 그냥 다 들려요~” 하시더라고요. 정말 <미지의 서울>에 대한 작가님의 사랑이 너무 느껴지죠. 그래서 저도 더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 드라마에 담긴 박신우 감독의 디테일도 연신 화제였어요.
감독님은 디테일 그 자체예요. 소품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세요. 로사 할머니(원미경)의 식당을 인수하기 위해 부동산 계약서를 내미는데 그걸 보고 “이건 개인 거래 양식이잖아요. 기업에서 쓰는 게 아니에요” 하시더라고요. 그 조그만 것 하나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으시더라고요. 또 쌍둥이를 의미하는 다른 색깔의 곰인형이 나와요. 미래가 미지인 척할 때, 미지가 미래인 척할 때 곰돌이가 힌트처럼 등장하죠. 예를 들어 미지 방에는 갈색 곰인형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미래가 미지인 척하면 그 방에는 흰색 곰돌이가 있어요. 정말 세세하게 연출을 신경 쓰세요.
- 분홍(김선영)의 집이 핑크 레이스에 찻잔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는 반면 옥희(장영남)의 집은 너저분한 것도 그런 디테일에서 출발한 것이겠죠.
저희 집 너무 지저분하죠. (웃음) 정리정돈이 안돼 있어요. 실제로 누군가가 집을 청소하려고 하면 박신우 감독님이 정리하지 말라고 말리셨어요. 과거에 할머니께서 미용을 하셨던 설정이라 그런 도구들도 그대로 두시고요. 공간 연출에는 감독님의 피, 땀, 눈물이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 1인2역으로 크게 주목받았지만 사실 <오 나의 귀신님>에서도 비슷한 설정을 경험했어요. 다만 그땐 봉선이 몸 하나로 봉선이와 순애를 연기했다면 미지와 미래는 서로 다른 외형, 성격으로 두번에 걸쳐 연기해야 했어요. 분석과 고민, 에너지와 시간 모든 게 배로 들었는데요. 1인2역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정통적인 1인2역은 처음이죠.
이런 역할은 배우에게도 쉽게 경험해보지 못할 일이잖아요. 그걸 제가 통과해봤다는 게 너무 뿌듯해요. 근데 정말 힘들었어요. <오 나의 귀신님>에서는 순애를 연기하기 위해 (김)슬기씨를 관찰하고 따라할 수 있었어요. 일종의 레퍼런스가 있는 거예요. 슬기씨를 기준으로 말투와 몸짓을 연구하면 됐는데 <미지의 서울>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스케치하려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 안에 있는 미지와 미래를 생각했어요.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성향을 하나씩 극대화해서 미지이고 미래일 수 있게 만들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정말 크게 느낀 감정이 하나 있어요. 정말 원 없이 연기해본다고. 언젠가 또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미지의 서울>을 만난 게 저에게는 큰 행운 같아요. 스스로도 성장한 걸 느껴요. 그동안은 상대방 연기에 맞춰나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 설계를 했죠. 몇초 있다가 어디를 보고, 어떤 시점에 혼잣말을 하는 방식으로요. 다양한 방식의 모든 연기를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체력적으로 한계도 컸을 텐데요.
체력이 정말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웃음) 어쨌든 모든 과정을 잘 버텨내야 했으니까요. 주변 스태프들이 “이렇게 하는데도 어떻게 안 쓰러져?” 하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걱정 반 염원 반. (웃음) 미지와 미래의 분량이 많다 보니 제가 쉬어야 다른 사람들도 쉴 수 있거든요. 정말 모두가 다 함께 고생했어요.
- 장면이 전환되지 않고 미래와 미지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들도 있잖아요. 그런 장면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촬영되었나요.
먼저 대역 배우님에게 제가 원하는 동선을 보여드렸어요. 예를 들어 미지 역을 먼저 촬영할 경우에는, 미래가 어떻게 움직였으면 좋겠는지 하나하나 다 보여드렸어요. “이 지점에 멈춰서주시고, 여기서 뒤돌아봐주세요”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세진(류경수)과 호수(박진영), 미래와 미지가 함께 만나는 장면에서는 어떤 순간에 호수를 보고 언제 미래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이런 타이밍을 맞췄어요. 나중에 제가 덧씌워지지만 각 인물들이 대화하는 타이밍을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대역 배우님이 대사도 말씀해주세요. 이 모든 상세한 사항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함이 커요.
- 본연기 외에도 계속 시야를 넓혀 많은 것을 살펴봐야 했겠네요.
그래서 나중에 놓친 부분이 보이면 너무 아쉬웠어요. ‘아, 조금만 더 빠르게 고개를 돌릴걸, 조금만 더 천천히 걸을걸’ 하고 후회가 많았어요. 재촬영이 현실적으로 어렵거든요. 그런데 그 후회가 저를 많이 성장시킨 것 같아요. 나중에는 이 후회들을 어떻게 줄일지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갔어요. 그러면서 많이 늘었고요. 다만 분장할 때 조급했죠. 미래 컷 먼저 찍고 미지로 분장하려면 그사이의 대기 텀이 길어지거든요. 모든 사람이 저만 기다리는 거예요.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 막연히 죄송한 순간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더 뛰어다녔어요. 쫓기는 마음이 들어서.
슬픔의 크기가 자라날 때
- <미지의 서울>에 담긴 슬픔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할머니 월순(차미경)과 미지의 작별이에요. “어제는 지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모른다”라는 주문을 가르쳐준 할머니를 미지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 함께 보내드려야 했어요.
촬영하면서도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미지가 할머니를 보내드리기 위해 신발을 신겨드려야 하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신만 신기면 이 모든 게 끝인데. 그래서 신발을 붙잡고 엎드린 채 엉엉 울었어요. 손이 아예 안 움직이더라고요. 감사하게도 그 시간을 모든 스태프가 기다려주셨어요. 미지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할머니께 신발을 신겨드릴 수 있을 때까지. 모두가 숨죽여 기다려준 그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요. 저는 이게 정말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생각해요. 꿈에서조차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하고 헤어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 또한 그렇게 보낸 사람들이 떠올라서 더더욱 미지와 월순의 이별을 잘 그리고 싶었어요. 이 장면은 우리 드라마의 가장 큰 마지막 산이었어요. 저도 너무 잘하고 싶어서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고 싶었어요. 마지막 화 앞둘 즈음에는 큰 산이 별로 안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 장면이 계속 남아 있는 거예요. (웃음)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어요. 긴장감도 컸고요.
- 집 안에 은둔하던 미지가 할머니가 쓰러진 것을 보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대문을 나가던 장면이 첫 촬영이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죠. 아무것도 빌드업되지 않은 상황에 어떻게 자신을 밀어넣나요. 무엇이 박보영을 몰입시키는지 궁금해요.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요. (웃음) 해야지 어떻게 해요. 촬영 전에 대본을 미리 보고 제 나름의 디자인을 세워요. 쓰러진 할머니를 보고 터질 것이냐, 아니면 대문 밖으로 나가서 살려달라고 할 때 클라이맥스를 만들 것이냐. 이런 것들을 혼자 계획한 후 감독님에게 슬쩍 말씀드리죠. 혹시 다르게 생각하시는 지점이 있는지. 첫 촬영은 그 순간의 감정을 따라가고, 이 장면을 기준으로 앞뒤 스토리의 강도를 맞춰요. 어떤 작품이든 첫 촬영이 기준이 되는 거죠. 먼저 하는 게 장땡이에요. 거기다 맞추면 돼요. (웃음) 물론 중요한 장면이 너무 앞에 있으면 부담이 되기도 해요. 보통은 가벼운 신으로 워밍업을 하고 다른 배우들과 합을 맞추면서 감정의 강도를 높여가는 게 좋지만 집중력이 필요한 장면을 처음에 해도 괜찮다는 것을 이번에 경험했어요. 첫 촬영에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제 조금씩 기분 좋은 긴장으로 낮춰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나름의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 됐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