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훈(윤현수)의 갈등 끝에 최종 러닝메이트 멤버를 완성한 곽상현(이정식) 캠프는 상대 후보가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장점을 화려하게 펼쳐낸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환호와 인사, 고급 초콜릿과 값비싼 선거복 유세, 휘황찬란한 생일 파티에서의 깜짝 홍보까지. 좌중을 압도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상현은 부지런히 영토를 확장한다. 게다가 학생들의 관심(혹은 망신살)을 한몸에 받는 노세훈과 모든 상황을 재빠르게 포착하고 판단하는 전교 1등 윤정희(홍화연)까지 합류하면서 곽상현 캠프는 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앞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어떤 것도 곽상현 사단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그때, 보이스피싱 사건을 막은 상대 후보 양원대(최우성)가 용감한 시민상을 받으면서 모든 민심은 한쪽으로 급격히 몰리기 시작한다. 10대 청소년 특유의 순수한 진심, 질투와 폭주,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야욕을 재료 삼은 곽상현 캠프는 기우뚱거리는 삼인사각 달리기 속에서 마지막 결승선까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서로의 손을 꽉 부여잡는다.
- <러닝메이트>의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곽상현, 노세훈, 윤정희를 맡았다.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앞서 각 인물의 어떤 점을 잘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대본 분석이 궁금하다.
이정식 상현이는 첫 등장의 임팩트가 강한 인물은 아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스멀스멀 등장한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뱀과 같다. 학생들 사이로 천천히 스며들 듯 등장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10대 청소년이라 다양한 사건, 사고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조금씩 튀어나온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현의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게 나에게 가장 중요했다. 무척 다채로운 면을 지니고 있다.
홍화연 정희는 겉으로 삐쭉빼쭉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구석이 있는 친구다. 그의 속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만 보고 정희를 미워한다. 정희의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거꾸로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봤다. 공부도 잘하고 많은 것에 능숙하지만 어쩐지 다가가기 어려웠던 친구들. 그들의 거리감이 어떤 태도에서 비롯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실제로 학원에서 자신의 포부를 영어로 읊는 장면에 나오는 대사는 내가 정희의 입장에서 준비해간 것이다. “세상을 바꿀 기회를 원하나?”라는 강사의 질문에 정희는 어떻게 답할 것 같은지, 한진원 감독님이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진짜 정희의 사고방식대로 그를 상상하며 채웠던 말이다.
윤현수 그 모습을 보고 세훈이가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떨어뜨린 건 찐 리액션이었다. 촬영장에서 그 장면을 처음 봤다. 많은 사람들이 세훈이를 아싸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순수하고 평범한 인물이다. 그렇게 평평했던 세훈이가 많은 사람과 사건을 마주하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생각의 굴곡이 잘 전달되길 바랐다. 너무 오랫동안 세훈이에 몰입해 지내다보니 역할에 빠져나오는 게 어려웠다. 표정, 몸짓, 모든 걸 세훈이의 마음으로 그렸다.
- 처음부터 지금의 역할을 맡았나. 오디션 과정부터 최종 결정까지 배역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궁금하다.
윤현수 처음부터 세훈이었다. 무척 감사하게도 이전에 같은 작품을 했던 프로듀서님이 나를 추천해주셨다고 한다. 한진원 감독님도 첫 미팅에서 나를 보자마자 세훈이에 어울린다고 하셨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날 나의 첫마디가 이랬다고 한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화장실 어디예요? (웃음)”
이정식 맨 처음 오디션에서는 상현을 연기했다가 이후에 다른 캐릭터를 제안받았다. 감독님이 그 인물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내용을 들으니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진짜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2개월 정도 그 캐릭터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먹었냐는 감독님의 문자에 ‘먹었지만 더 먹어도 좋다’고 답한 뒤 작은 술집에서 만났다. 그때 감독님이 다시 상현이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으셨다. 긴 시간 다른 캐릭터를 연구하며 지냈기에 처음에는 좀 놀랐다. 하지만 나 또한 상현이의 첫인상이 너무 좋았고 궁금해서 다시 상현이에게 초점을 맞췄다.
홍화연 나는 처음에 유경 역할로 오디션을 봤다. 대본 읽기도 2차까지 유경의 대본을 받았다. 그런데 최종 결정은 정희였다. 나중에 감독님이, 내가 외형적으로 똑똑해 보여서(쑥스러운 웃음) 정희를 잘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 배우마다 인상 깊은 장면들을 더 깊이 이야기해보자. 먼저 윤현수 배우. 세훈은 교실 내 피라미드에서 어중간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모나지 않아서 모든 게 잔잔히 흘러간다. 그런데 합창단장을 추천하는 장면에서 양원대를 의식한 저돌적인 눈빛은 지금까지 드러난 적 없던 세훈의 경계심을 선명히 보여준다. 세훈의 감정적 강도를 유연하게 조절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윤현수 평범하게만 지내던 세훈이 양원대의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오히려 세훈의 야망이 더 커졌다. 세훈이는 속엣말을 많이 하지만 동시에 겉으로도 말을 많이 한다. 그것도 매우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그때마다 세훈의 마음 한구석에 움트고 있는 야망을 빌렸다. 특히 양원대에게 받은 자극 때문에 촬영할 때 실제로 화나는 느낌을 받았다. 또 상현에 대한 믿음이 커지면서 경계심이 더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 이정식 배우는 정치 하이틴 드라마를 누아르처럼 묵직하게 누른다. 남산타워에 갔던 날, 레스토랑에서 상현이 취한 행동은 물이 든 잔을 위스키처럼 빙글빙글 돌리는 것이었다. 캐릭터의 무게를 드러내는 디테일은 어떻게 완성된 것인가.
이정식 양원대 캠프가 대부분 밝은 곳에서 활동한다면, 곽상현 캠프는 어두운 곳에 있다. 상대적인 무드 차이가 공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때 상현이는 자신이 다른 친구들이랑 같은 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당연하게도 더 멋지고 더 낫다고 생각한다. 사실 물을 술처럼 돌리는 것도 일종의 어른 행세다. 상현이는 세훈에게 바로 그 지점을 인식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남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그런 성향을 은유적으로 보여줄 디테일을 찾다가 잔을 돌렸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돌려서 감독님이 “지금 너무 개츠비 같은데?”라고 하셨다. (웃음)
- 홍화연 배우는 정희가 지닌 간극을 사랑스럽게 다룬다. 정희는 선거 공약을 만들기 위해 주변 학교 공약을 모아 데이터를 산출할 만큼 똑똑하고 냉철하지만 자신을 질투하는 세훈에게 똑같이 휘말리는 허당기가 드러난다. 이 이면을 어떻게 드러내고 싶었나.
홍화연 정희는 정말 극강의 T다. 그런데 그런 정희조차 인간적인 면을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 그런 지점을 끌어내는 게 세훈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술하고 친근한 세훈의 모습에 정희도 마음의 벽을 허물고 심리적 거리도 가깝게 좁힌다. 어느 순간 둘이 나란히 걷고 있다. 그런 변화를 찾는 게 무척 재미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다. 현수와 나는 촬영 초반엔 서로 어색해했는데 함께하면서 엄청 친해졌다. 마지막 장면을 초반에 찍었다가 가까워지고 나서 다시 찍을 정도였다.
- 여기서 질문 하나. 정희는 왜 뜬금없이 세훈에게 올리브영을 같이 가자고 했을까.
윤현수 내가 봤을 때 이건 진짜 플러팅이다.
홍화연 나(정희), 너 안 좋아한다고!
- 두 캠프의 지지율 곡선이 공개된 건 첫 번째 유세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전교생이 북적거리는 학교 교문에서 서로를 어필하려 애쓰는 모습은 현실 세계의 유세 현장과 흡사하다.
이정식 유세 장면을 자세히 보면 두 캠프로 나뉘고, 또 그 안에서 각자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는 작은 팀으로 나뉘어져 있다. 인물마다 개성이 잘 드러나도록 감독님이 수평적인 분위기를 이끌어주셨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할 법한 것들을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많은 인원이 등장하는데도 캐릭터의 입체성이 살아난 거다. 또 잊을 수 없는 게, 보조 출연자 중 실제 10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열정적으로 유세에 참여해줘 장면 자체가 풍성해졌다.
- 나라면 어떤 공약에 끌릴 것 같나.
윤현수 우리 캠프가 제안한 프랜차이즈 카페 공약. 교내에 카페를 두고 무료 쿠폰까지 준다고 했다. 정말 솔깃하다.
이정식 양원대 캠프의 공약이지만 수학여행 부활 공약. 이걸 상현으로서 접근한다면 유럽으로! (웃음)
홍화연 나도 사실 수학여행 부활. (웃음)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좋다.
- 그간 정치 싸움과 암투를 다룬 학원물이 부모의 권력을 답습하는 게 보편적이었다면 <러닝메이트>는 학생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고 실행한다. 스스로 태동하는 청소년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홍화연 아이들의 작은 일로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시절엔 전부처럼 느껴지는 큰 사건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여 욕심도 내보고 목소리도 내보는 것도 그 나이대이기에 가능하다. 뭔가를 저질러도 허용되는 시기를 모두가 다시 느껴보면 좋겠다.
이정식 <러닝메이트>는 명랑 정치 하이틴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결국 친구다. 선거 과정에 많은 친구들이 관계성에 변화를 겪는다. 10대 시절을 통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당시 내 옆에 있던 친구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공감하게 될 것 같다. 특히 마지막 화인 8부. 모든 것이 그때 쏟아진다.
윤현수 우리 작품에는 10대라서 가능한 변화들이 있다. 옳은 결정이든, 그른 결정이든 모두가 스스로 선택하고 그 몫을 받아들인다. 10대 아이들이 겪어가는 변화를 집중해서 봐주면 좋겠다. 또 어른의 정치에 피로해진 분들이 10대가 만들어가는 명랑하고 밝고 유쾌한 정치를 느끼기에도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