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한올 흘리지 않고 끌어올린 헤어스타일과 수평을 맞춰 자리한 넥타이, 각이 살아 있는 셔츠와 재킷. 치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강길우 배우의 소감이 더없이 잘 들어맞는 주인공이다. 내과의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치성 앞에 어느 날 그의 DNA를 물려받은 소년 영재(이찬유)가 나타나고, 난데없는 ‘아들’의 등장에 치성의 삶은 크게 요동친다. 자신이 치성에게 잘 다가갈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는 강길우 배우의 우려와 달리 그는 냉철한 단면만 내보이던 치성이 서서히 영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마침내 자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등장해 제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떠나는, 어쩌면 지금까지 배우 강길우가 분했던 수많은 전문직 중 내외적으로 가장 다이내믹한 변화를 겪는 캐릭터가 아닐까. 2013년 연극 <마법사들>로 데뷔한 이후 영화와 드라마, 연극무대를 자유로이 오가는 그는 데뷔 13년차인 현재도 여전히 현장이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무엇이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관객 앞에, 무대 위에 서도록 만드는 것일까. 궁금증을 안고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 처음 <프랑켄슈타인 아버지> 시나리오를 읽고 받은 인상은.
처음 받은 글은 촬영본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구성이 독특하고 묘한 무드가 있어서 기존의 내 작품들과 겹치지 않는다면 해보고 싶었다. 감독님과 의견을 많이 나눴고 그 과정에서 시나리오가 수정된 부분도 많다.
- 원래 시나리오에 의견을 많이 주는 편인가.
그렇진 않다. 특히 신인감독님과 일을 할 땐 웬만해선 의견을 내지 않으려 한다. 본인의 생각이 담긴, 본인이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야 다음에 또 자기 작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번 작품이 예외였던 건 감독님이 내 의견을 듣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첫 시나리오라 손대고 싶지 않을 수 있는데 최재영 감독님은 그런 것 없이 열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의 톤과 이미지는 명확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영화의 핵심은 훼손되지 않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처음에 치성이 다소 비호감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하기에 치성의 전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신이 필요하겠다고 느꼈다. 치성이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특정 부분을 영재(이찬유)에게 전가하는 장면도 잘 살고, 치성의 감정에도 당위가 생길 것이라는 데에 합의점이 모였다.
- 초반부 치성의 모습을 비호감이라고 표현한 지점이 재밌는데, 특히 어떤 부분이 그랬나.
내가 느낀 첫인상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사람이란 것이었다. 배우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관객들이 호감을 갖고 치성을 봐줄까 싶었다.
- 수정본을 보니 치성의 행동에 설득이 되던가.캐릭터에 연민을 느끼고 설득도 되어야 배우도 움직일 수 있는데, 감독님이 써오신 최종고를 보고 납득이 됐다. 치성 본인도 어린 시절 운동을 포기해야 했고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받았기에 영재를 자기식대로 케어해주고 싶어 한다. 그 방식이 올바르진 않지만 말이다. 후반부에 영재가 “나를 너희들의 하자로 만들지 말라”고 외치는 게 통쾌해서 결국 작품에 합류하겠다고 했다.
- 치성이 영재를 대하는 태도가 독특하다. 최재영 감독은 ‘분신’이라고 표현하던데, 치성이 영재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바라던 아버지상이 되어 영재를 돌보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영재를 완전히 부정하다 자신이 어릴 때처럼 그가 운동을 한다는 사실과 영재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되면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걸 바로 알아차렸을 것 같진 않다. 처음에는 아버지로서 책임을 지려 하다가, 영재가 떠나고 온전히 혼자 남게 된 이후에야 영재를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다름없이 바라봤다는 걸 받아들였을 것 같다. 영재처럼 나도 저 나이 때 저렇게 아버지를 밀어내고 원하는 대로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후회도 하면서 그렇게 자기 삶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 영재를 아들로서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했다고 보나.현장에서 연기할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치성이 영재를 아들로서 받아들였다고 여기진 않았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건 맞지만 치성이 생각한 아버지의 개념은 그것과 다르다. 오히려 둘 중 누가 진짜 아버지냐고 한다면 법적 아버지인 동석(양흥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프랑켄슈타인 아버지>는 부모로서 아이를 책임진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인물들의 자기해방에 관한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DNA를 받은 아이를 마주했을 때 치성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기보다는 그 아이로 인해 자신을 더 알게 되고 미래까지 바꿔나갈 수 있는 해방의 시초를 다룬 영화라고 봤다.
- 처음 영재가 등장했을 때 치성은 엄청난 경계심을 보이면서도 그를 자신의 아파트로 들인다. 자기 삶의 영역이 명확한 치성이 신원도 불확실하고, 아들로 여기지도 않는 소년을 서슴없이 집에 들일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본인의 완벽한 삶의 오점이기 때문에. 실제로 내 유전자를 받은 아이인지도 확인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하든 입막음을 하든 일단 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온전히 받아들인다기보다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가까이 둔 것이다. 대신 집 안의 영재의 흔적을 곧바로 치우고 영재가 입고 온 옷도 유심히 살핀다.
- 치성은 항상 단정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옷도 칼 각을 유지하는 스타일이니 영재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치성의 외형에 관해서도 의견을 준 바가 있나.
분장팀, 의상팀에서 준비를 많이 해줘서 내 의견을 덧댈 필요가 없었다. 다만 실제로 감독님도 치성처럼 매일 푸시업을 하는 루틴이 있으시다길래 관련해 여쭤본 적이 있다. “감독님, 치성한테 감독님이 어느 정도 반영됐나요?” (뭐라고 답하시던가.) “…일부?” (웃음)
- 배우 본인과 닮은 부분은 없나.나도 아예 널브러지거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편은 아니다. 정돈된 삶의 루틴이 있고 인간관계에서도 거리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치성만큼은 아니지만, 물건들의 수평을 맞추는 습관이 있긴 하다. (책상 위의 핸드폰을 바로잡으며) 기왕이면 핸드폰이나 책의 간격, 각도를 맞추고 싶어 한다. 어쩐지… 치성이 신발 각을 바로잡는 행동이 어색하지가 않더라. (웃음) 얼마 전에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 나를 차가운 이미지로 바라보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았다. 나를 차가운 이미지로 바라보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치성을 잘 연기할 수 있을지 부담도 느꼈는데. 자기 객관화가 잘 안되어 있나보다.
- 특별한 비하인드가 있는 신을 소개해준다면.치성이 영재에게 복싱을 가르쳐주는 신이 있다. 시나리오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는데 내가 넣었다. 치성이 워낙 틀에 박혀 사는 사람이라 이런 애드리브를 해도 될지 고민했는데 감독님이 이런 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셔서 넣었다. 그때 한창 복싱을 할 때라 이렇게 한번 써먹는구나 싶었다. (웃음)
- <프랑켄슈타인 아버지>를 찍고 나서 생각이 바뀐 지점도 있나.
아버지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자식 입장에서는 부모를 당연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데,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내가 본 것과 다른 모습이 많이 존재했겠구나 싶었다. 여러모로 아버지에 관해 깊게 생각해볼 계기가 되어준 작품이다.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께 하진 않겠지만.
- 얼마 전 유은호(이준혁)의 회사 동료 김동기 역으로 등장했던 <나의 완벽한 비서>가 종영했다. 돌이켜보면 친숙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시리즈물에 종종 얼굴을 비췄다.
<재벌집 막내아들> <더 글로리>와 같이 크게 조명받은 작품에서 직장인으로 등장했기에 대중들에게 그런 이미지로 익숙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독특한 역할도 자주 했다. <연인>에서는 매국노 정명수를, 이상한 박사를 연기한 적도 있고 최근 촬영한 작품에선 깡패로 등장했다.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의 모습을 보고 소속사 직원 분이 그러더라. “오랜만에 정상적인 역할을 하셨네요.” (웃음)
- 맡았던 캐릭터 중 가장 이상한 건 아마도 <몸값>의 민씨가 아닐까.
그건 정말 나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나인 줄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는 역할을 좋아한다.
-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더 즐거운가.아무래도 그런 캐릭터들이 더 자유도가 높다. 시대극, 장르물 속의 캐릭터는 백지에서 시작할 때가 많아 감독님도 많이 열어주신다. 그래서 생각한 대로 표현하고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하곤 하는데 그걸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준다면, 그때 느끼는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해가는 편인가.생각을 많이 해두고 현장에 맞춰 시도한다. 그런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여기는데 내가 너무 내가 가진 것 안에서만 하나, 더 새로운 걸 꺼낼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고민 때문이다. 더 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촬영 끝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렇게 할걸 하면서 후회하고, 집에서 대본 보면서 다시 연기도 해본다. 앞으로 비슷한 장면이 나오면 현장에서 주저하지 않고 더 과감하게 연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행동이지만 사실 의미 없진 않다.
- 쉽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연기를 하게 되는 걸까.
그런지도 모른다. 어느 현장이나 고통스럽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 계속 존재해야 하는데 맡은 캐릭터를 크게 벗어나면 안된다는 게 무척 힘들다. 어떤 날은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가 안돼 약도 먹지만, 이상하게 또 재밌다. 아직 내 연기가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일이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 그러면 통장에 박히는 돈만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연기에는 풀리지 않는 뭔가가 있다. 다음에는 풀어내야지, 또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음 현장을 기다린다.
- 지난해 ‘인디플러스 영화의전당’에서 강길우 배우전이 진행됐을 때, <시체들의 아침> <한강에게>가 상영됐던 본인의 첫 전주국제영화제 배지를 관객에게 깜짝퀴즈 선물로 줬다는 게시물을 SNS에 올렸다. ‘적어도 나보단 영화를 더 좋아하는 분에게 간 것 같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영화 <시체들의 아침>의 성재의 마음이 이것과 비슷하려나? 그 정도는 아닌가. 물론 나는 영화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은 글귀가 인상적이었는데, 무엇이 그토록 영화를 사랑하게 만드나.
어릴 때부터 영화배우가 꿈이었다. 중학생 때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를 그냥 고르지 못하고 1시간 동안 제목만 유심히 바라봤던 적이 많다. 그림을 오래 그렸기에 말로는 화가가 될 거라고 말했지만 속으론 영화배우에 대한 꿈이 항상 있었다. 무대미술을 하려고 진학한 연극영화과에서 우연히 연기를 시작했고, 연극을 하면서도 늘 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단편도 찍고, 영화제에도 가보게 됐다. 제주에서 <파도를 걷는 소년>을 찍을 때 내가 안 나오는 신을 뒤에서 구경한 적이 있다. 배우와 제작진이 모여 촬영하는 보습을 보는데 너무 가슴이 벅차는 거다. 그래서 숙소까지 전력 질주를 했다. “그래! 영화를 해야 돼!” (웃음) 긴 설명 필요 없이 영화는 그저 내게 너무 멋있는 존재다.
- 지금 이야기한 것도 청춘영화의 한 장면 같다. 돌이켜보면 상업영화와 매체를 오가면서도 꾸준히 단편영화에 모습을 보였다.
더 많이들 연락을 주시면 좋겠다. TV에 나오기 시작하면 왠지 단편을 더이상 안 할 거라는 편견이 생기는 듯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더 많은 단편 시나리오를 기다리고 있다.
- 차기작 계획은.얼마 전 상업작 촬영을 하나 끝냈고 지금은 <정말 먼 곳>을 찍은 박근영 감독의 신작을 함께하고 있다. 촬영, 녹음, 제작까지 대부분 <정말 먼 곳>의 스태프들이라 반갑다. 강릉 신영극장, 원주 아카데미극장, 인천 미림극장 등을 돌아다니는 평론가가 있고 나는 그와 대학 시절 함께 영화 동아리를 했던 동료다. 현재는 원주에서 식당을 한다는 설정이다. 주인공이 예전에 같이 영화를 만들었던 한 후배를 떠올리는데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친구가 단편영화제에 출품했던 영화를 찾으러 다니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극장의 풍경이 예전과 다르기에 이를 그리워하며 촬영한 영화라고 봐주시면 되겠다. 영화에서 15년 정도 전의 서울독립영화제의 모습을 재현하는 신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대학생이던 시절에 영화를 출품하고,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로비가 북적대던 그 느낌을 살리는 신이 있는데, 아직 찍진 않았지만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