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는 필연적으로 빨갛게 볼이 달아오르는 시기다. 비단 여드름 때문만은 아니다. 매사 급물살치는 희로애락에 불안정한 내면을 아낌없이 강타당하다 보면,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섬약한 마음을 찢기다가도 이내 타인에게 얼음장 같은 말을 비정하게 내리꽂다 보면, 자연히 뺨이 울긋불긋 날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는 한자어 풀이처럼 사춘기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꽃이 무성히 피었다 지는 봄철이기도 하다. 애틋해서 아련하고 덧없어 소중한 날들이다.
1인 밴드 볼빨간사춘기의 음악 또한 활동명 그대로 사춘기의 정체성을 품고 있다. 사랑하는 상대가 애태울지언정(<좋다고 말해> <나만, 봄>) 그에게 온 우주를 안겨주고 싶다고 고백한다(<우주를 줄게>). 뜻대로 안되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다가도(<나만 안되는 연애> <나의 사춘기에게>) 바로 울적한 마음을 털고 호기롭게 떠날 계획을 세울 수 있다(<여행>). 모두가 극심하게 지나온 시기를 노래하는 볼빨간사춘기에게 대중은 8년째 열광 중이다. 그 결과 볼빨간사춘기는 1억 스트리밍 달성곡이 무려 9곡에 달하고, 신보를 발매할 때마다 인기 차트에 수록곡을 줄 세운다. 지난해 하반기 아시아 5개국 투어 콘서트를 마친 후 연말 단독 콘서트까지 성료한 볼빨간사춘기는 두 공연의 실황을 담은 영화 <볼빨간사춘기: 메리 고 라운드 더 무비>로 또 한번 관객과의 소통을 준비 중이다. 7월12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하는 영화를 세상에 공개하기 전, 볼빨간사춘기가 <씨네21> 스튜디오를 미리 찾아 영화와 지난 8년의 음악 인생을 되짚어주었다.
- 2023년 하반기 진행한 아시아 5개국 투어 비하인드와 한국에서 진행한 <2023 볼빨간사춘기 단독콘서트 ‘Merry Go Round’> 실황이 영화에 담겨 있다. 두 공연의 영화화 기획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고민이 있었다. 라이브 콘서트는 순간이지만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평생 남는 기록물 아닌가. 평소 아카이빙되는 영상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터라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찬란한 20대의 마지막 순간을 남겨두는 일이 완벽을 향한 강박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심한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 아시아 투어 당시 국가별로 다른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 어떤 도시를 방문하든 공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특유의 공기가 있다. 도시마다 다른 그 공기를 공연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번 투어를 돌며 내가 하나의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 금방 질려한다는 걸 배웠다. (웃음) 질리지 않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도시별로 새로운 스타일링을 선보인 이유엔 관객들을 기억하기 위함도 있었다. 내가 이 옷을 입었을 때 어떤 국가에서 공연했다는 걸 마음속에 명확히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면 각 도시의 관객들도 무대 위의 내 모습을 특별하게 기억할 것 같았다.
- 투어 도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당시 아시아 투어를 진행하던 다른 가수들도 있던 터라 외국 관객들이 웅성거려도 다른 아티스트의 팬일 거라 추측했다. 밴드 멤버들이 저들이 나의 팬이라고 귀띔할 때조차도 나의 팬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들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지영아! 지영아!”를 외치는 게 아닌가. 다가가서 물으니 자신들을 ‘러볼리’(볼빨간사춘기의 팬덤명)라고 밝혀 놀랐다. 다들 한국어도 잘하더라. 짜릿한 기억이다.
여전한 첫 마음을 관객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 영화 초반과 후반, 데뷔 앨범 《RED PLANET》의 역주행 히트곡이었던 <나만 안되는 연애>가 두번 등장한다. 영화를 보니 한동안 이 노래를 라이브로 부르지 않았다고. 발매 당시와 지금 이 곡을 부를 때 느낌이 다른가.
= 제목 그대로 나만 안되는 연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는 원초적인 감정으로부터 출발한 곡이다. 그 감정이 음악을 시작하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어린 마음에 썼던 가사인데 여전히 노래를 부를 때면 그때의 먹먹함과 아픔을 느낀다. 이 감정이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음악을 만들 당시의 초심을, 여전한 첫 마음을 관객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다만 점차 진해졌으면 좋겠다.
- 워낙 히트곡이 많다 보니 콘서트마다 세트리스트를 짜는 일이 쉽지 않을 듯하다.
= 공연의 기승전결을 중시한다. 공통의 패턴이 있다면 <좋다고 말해>와 같이 유명한 노래를 초반에 배치하고, 공연 중반에 감성적인 곡을 부른 다음 <여행> <워커홀릭> 등 관객과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노래는 공연 후반에 몰아둔다. 신나게 놀았던 기억으로 다시 콘서트를 찾는 관객이 꽤 되기 때문이다. 가끔 러볼리가 아닌 분들도 공연장을 찾지 않나. 그분들이 공연장에 와 “이게 볼빨간사춘기의 노래였어?”라며 놀라는 경우가 있다.
- 특유의 음색과 창법이 그렇게 유명한데도 볼빨간사춘기의 노래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나.
= 아무래도 팬이 아니고선 수록곡을 전부 챙겨 듣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이야기를 가진 가수인지 공연에서 목숨 걸고 보여주고 싶다. 어떻게든 합주를 더하고, 중간 멘트를 자주 검수한다.
- 이번 공연에 등장한 <Seattle Alone>과 <Rome>은 여행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로 알고 있다.
= 주로 혼자 여행을 떠난다. 혼자 머물수록 그 지역의 정서를 강하게 체득한다. 그럴 때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의 분위기를 많이 바꿔준다. 새벽의 바에서 만난 바텐더 할아버지, 바의 단골들처럼 사람으로부터 오는 느낌도 여행 중 많이 저장해둔다. <Seattle Alone>은 시애틀과 포틀랜드를 여행할 때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 <Rome>은 로마를 닮은 노래다. 낮엔 사람이 붐벼 정신이 없는데 밤만 되면 주황빛 가로등 아래 도시가 정말 조용해진다. 그때 전동 킥보드를 타며 밤의 도로를 달릴 때 받은 감성을 그대로 담으려 했다. 가사에 등장하는 ‘Ciao Rome’(안녕 로마)은 실제로 내가 킥보드 위에서 외쳤던 말이다.
- 연 2회 여행을 떠나는 걸 연례행사로 삼고 있다고 들었다. 볼빨간사춘기의 최고 히트곡인 <여행>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웃음)
= 직장인들이 휴가지에서 돌아오는 날 다음 여행 티켓을 발권한다고 하지 않나. 유사한 마음이다. 나는 여행하기 위해 일을 한다. 처음 혼자 떠난 여행지가 런던이었다. 혼자 있다 보니 혼잣말도 많이 하고 사람들 눈치도 보다가 괜찮은 사람이 보이면 대화도 시도하게 되더라. 한국의 나와 또 다른 자아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대화할 사람이 없을 땐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건넨다. 그렇게 나를 리셋하고 삶의 근거지로 돌아오면 사는 게 좀더 수월해진다. 예전엔 회사 몰래 여행을 떠난 적도 많은데(웃음) 이젠 소속사도 내가 여행을 떠나는 상하반기에 자연스럽게 휴가를 보낸다.
- 앙코르곡으로 <Mermaid>를 부르다 울컥한 순간이 영화에 포착됐다. 수차례 방송과 콘서트 등에서 부른 노래인데 유독 공연날 이 곡이 깊게 와닿은 찰나를 어떻게 기억하나.
= 이 노래는 팬들과 나의 암묵적인 팬송이다. 인어공주가 무한히 사랑한 왕자가 곡의 화자다. 내가 리스너로부터 받는 사랑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당신 곁에서 오래오래 노래하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고로 이 노래를 부르면 자연히 팬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팬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힘들어하던 시기에 나를 지켜내느라 무척 애썼다. 그런 팬들과 <Mermaid>를 부르다 눈이 마주친 거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해 울컥했다. 그렇지만 나는 P.R.O니까! (웃음) 울지 않으려 한다. 정말이다. 근래 사명감이 생겼다. 한동안 <나의 사춘기에게>를 부르면 울던 때가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 감정에 따라 울어버리면 이 곡이 말하는 바를 오롯이 전달할 수 없다.
좋은 추억을 노래로 저장 해두며
- 볼빨간사춘기의 곡 소개를 보면 늘 곡의 탄생 경위가 상세히 적혀 있다. 특히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 순간을 자주 설명하는데.
= 주로 일상에서 많은 이야기를 길어온다. 밥 먹을 때, 드라마 볼 때…. 사실 드라마를 보며 밥을 먹는다. (웃음) 친구들과의 대화, 반려묘 레오를 볼 때의 감정 등에서 여러 영감이 온다. 그래야 노래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랑이 이별이 돼 가는 모습이>는 드라마 <그 해 우리는>에서 최웅(최우식)이 소리치는 장면을 보았을 때 저 감정을 나도 노래로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만들었다. <나비와 고양이>는 창밖을 보는 반려묘 레오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만든 노래다. 레오가 창밖의 곤충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그러다 사랑과 이별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뻗어나갔다. 영감을 위해 일부러 영화를 보거나 책을 탐독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 일상의 어느 순간을 곡에 드러내는 일의 어려움은 없나. 삶의 어떤 순간만큼은 음악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을 위해 아껴두고 싶을 때도 있을 듯한데.
= 솔직히 말하면 기억력이 짧은 편이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공연을 찾는 팬들의 얼굴은 기억하더라. 그걸 경험하니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습득한 정보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좋았던 기억은 반복해 유사한 상황을 만들고 접하려 노력한다. 좋은 추억을 노래로 저장해두고, 이를 누적해 부를 때 쌓이는 좋은 기억이 내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좋은 기억은 살면서 계속 마주하고 싶지 않나. 관객들도 두세번 볼빨간사춘기의 무대를 만나면 좋은 기억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 볼빨간사춘기의 음악에 자주 달리는 댓글 중 하나는 “가사가 내 이야기처럼 솔직하다”이다. 주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떠올리고 후행적으로 멜로디를 입히는 방식으로 곡을 만드나.
= 반반이다. 샤워하거나 길을 걷다 멜로디가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꽤 있다. 술 한잔 마시고 멜로디가 나올 때도 있는데, 그건 백이면 백 다음날 들어보면 기가 차 못 쓴다. (웃음) 드라마 대사에서도 많은 자극을 얻는다. 예컨대 지금 빠져 있는 <선재 업고 튀어>를 시청할 땐 1시간짜리 에피소드를 2시간씩 감상한다. 선재(변우석)가 나오는 파트를 돌려보고 휴대폰 메모장에 드라마로부터 도출해낸 가사를 적어둔다.
- 볼빨간사춘기의 솔직함은 안지영 본인과도 연관이 깊다. <카운슬링> <In the mirror> <별>과 같은 곡의 소개 글을 읽으면 이 곡을 만들 당시 인간 안지영의 상황을 고스란히 적어뒀다. SNS에 현재 본인이 심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 적도 있다. 글이든 음악이든 창작자로서 자신이 내놓는 결과물에 솔직한 편이 낫다고 믿나. 솔직한 글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음반이 한편의 에세이집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 그렇다. 상상을 보태기보단 내가 쓰고 싶은 솔직한 마음을 가사와 음에 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행여 직접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곡을 만든다. 그게 쌓여 볼빨간사춘기의 정체성으로 자리했다고 믿는다. 억지로 타인인 척하며 노래를 만드는 건 나와 맞지 않다. 에세이집 출간은 인생에서 한번은 이루고 싶은 버킷 리스트 중 하나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기회가 된다면 30대 안에는 한번은 내보고 싶다. 안 그래도 같은 회사에 스웨덴세탁소 언니들도 에세이를 낸 적 있다. 읽자마자 나도 해보고 싶었다.
- <슈퍼스타K6>를 경력의 시작으로 본다면 어느덧 10년차 싱어송라이터다. 싱어송라이팅이 볼빨간사춘기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
= <In the mirror>의 가사처럼 계속 거울을 응시하는 느낌이다. 거울을 보면서 오늘 나의 상태를 매일 들여다보듯 음악을 통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직시할 수 있다. <In the mirror>를 발매했을 당시엔 정말 거울 보는 게 괴로웠다. 스스로가 참 많이 망가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데뷔 초엔 거울 보는 일이 가장 행복했는데 말이다. 지금은 거울을 보면 적당한 웃음과 적당한 짜증이 난다. 계속 나를 비춰보며 ‘이땐 내 상태가 이러하니 이런 음악이 나올 수밖에 없구나’ 하며 지난 시간을 복기한다.
- 볼빨간사춘기가 가진 ‘사춘기’의 정체성은 어떻게 나이 들어갈까.
= 사춘기의 정체성이야말로 볼빨간사춘기가 가지는 본연의 것이라 앞으로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갑자기 미디엄 템포의 발라드를 부르거나 디스코음악을 할 순 없지 않나. (웃음) 내가 추구하는 사춘기 감성은 여린 살결 같은 마음이다. 부드러워 손대기 쉽지만 또 쉽게 상처 입을세라 곱게 만지고 싶은 감성을 담아, 다치더라도 금방 새살이 차오르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