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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 마음, 영원히 뜨겁기를’, <정순> 배우 윤금선아
이유채 2024-04-09

<정순>에 관한 한 윤금선아 배우의 기억력은 실로 대단했다. 대본을 읽는 동안 느낀 감정과 정지혜 감독의 디렉션, 김금순 배우와의 호흡까지. 그가 <정순>의 거의 모든 걸 생생히 기억하는 건 그만큼 이 작품이 그에게 남긴 게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극 중 윤금선아는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엄마 정순(김금순)의 딸 유진을 연기했다. 불행에 빠진 엄마를 건져내려는 유진의 사투는 자그마한 체구 안에서 고요히 뿜어져 나오는 배우의 힘을 받아 더욱 절실해진다. 2011년 <열일곱, 그리고 여름>으로 데뷔해 독립영화계에 뿌리내린 윤금선아는 최근 <마인>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등의 드라마에도 얼굴을 비추며 “하고 싶은 연기를 마음껏 해보는” 중이다. 간만의 인터뷰가 떨려 가장 좋아하는 장면에 대해 말하는 걸 열심히 연습해왔다는 배우에게 우선 그 이야기부터 풀어달라고 청했다.

- 그래서 어떤 장면을 가장 좋아하나.

= 극 후반에 운전대를 잡은 정순이 논두렁 같은 길을 가는 신.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나도 영화제에서 먼저 본 관객도 위로받았다고 말하는 신인데 개봉하면 더 많은 관객에게 희망을 전할 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비 신부인 유진이 자기 옷을 개면서 예비 남편과 대화하는 신도 소중하다. 대화 신이 어느 촬영 날의 첫 번째 순서였다. 콜이 빨라 굉장히 미안해하던 정지혜 감독님의 표정, 첫 촬영이 하필 감정 신이라 심하게 느꼈던 긴장감, 그럼에도 여유를 찾게 한 상대배우의 눈빛과 손의 따뜻함이 다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 듣다 보니 현장 분위기도 궁금해졌다.

= 더 보탤 것도 없이 편안한 현장이었다. 엄마를 연기한 금순 선배와 특히 잘 지냈다. 우리의 대화는 연기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이 주로 이랬다. “선배님, 포테이토 과자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고 싶어요.” “그러니? 선아가 먹을 줄 아는구나.” (웃음) 어디 불편한 점 없는지 늘 세심하게 챙겨주시고 쭈뼛대던 내게 먼저 다가와준 선배 덕분에 마음을 열 수 있었고 그렇게 형성된 친밀한 관계가 모녀 사이를 연기하는 데에도 확실한 에너지를 주었다.

- 극 중 정순과 유진 사이는 서로의 어깨에 파스를 붙여줄 때의 거리만큼 가까우면서도 싱크대 앞에서 목 놓아 우는 엄마와 멀찍이 서서 바라보던 딸의 거리만큼 멀기도 하다.

= 현실 모녀란 게 그렇지 않나. 한결같이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공감이 많이 갔다. 파스 신을 얘기하니 촬영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 신에서 유진이 웨딩드레스는 어떻게 했냐는 엄마에게 인터넷으로 주문했다고, 요즘은 다 이렇게 셀프로 한다고 큰소리치는데, 그 대사는 내 애드리브였다. 실제로 그렇게 결혼식을 준비한 내 경험을 대사에 녹이고 싶다고 감독님에게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다행히 오케이해주셨다. 싱크대 신을 찍은 날은 내가 정순 모녀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했던 날이라 기억에 생생하다. 주저앉는 선배를 눈앞에서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엄마는 늘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엄마도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그 순간, 진짜 정순의 딸로서 했던 것 같다.

- 자각하는 딸 역할을 한 경험이 윤금선아 배우와 어머니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 물론이다. 원래 나는 유진 못지않게 오지랖이 넓은 딸이라 ‘엄마,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런데 <정순> 이후에 변화가 생겼달까. 어느 날 엄마가 슬리퍼 같은 걸 신고 등산을 가시려는 거다. 예전 같았으면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운동화 사러 가자’라면서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이번엔 ‘엄마가 자신에게 가장 편한 걸 고른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엄마, 그래도 운동화가 덜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한마디에서 멈췄다. (웃음)

- 갑작스레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의 딸이 된 유진도 정순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진은 엄마의 유일한 보호자로서 어떻게든 사건을 수습하고자 경찰서를 오간다. 그때 윤금선아 배우의 유령 같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 경찰서 장면을 찍을 때 실제로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큰일을 당했다는 생각에 경찰서에 온 유진과 달리 별것 아닌 일로 왔다는 내부 분위기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이런 대응을 현실로 경험했을 실제 피해자와 그 가족의 괴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경찰 역할을 한 배우의 무기력한 눈과 마주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멍해졌고 그 감정이 얼굴에도 드러난 것 같다. 사실 처음엔 감독님에게 유진이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필했 다. 그런데 감독님이 “이 작품은 정순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가는 영화”라고 설명해주셨고 그 얘기를 들으니 유진의 존재감은 지금 정도가 적절하다는 생각이 즉각 들었다.

- 9년 전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 수상 기념으로 한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드니 라방처럼 발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 포부는 여전한가.

= 그때 그 열정만큼은 그대로다. 요즘은 어디서 상 받았다는 영화들을 다 챙겨보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분석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추락의 해부>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기에 봤는데, 잔드라 휠러의 연기가 실로 대단했다. 어쩜 그렇게 모든 게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그의 연기력이 정말 탐났고 연기 욕심이 배로 늘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 배우가 되고 싶었던 시점은 초등학교 3, 4학년 시절, 발표 시간이었다. 모두가 나를 주목한다는 느낌을 즐겼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시선의 즐거움을 못 잊어 연극반에 들어갔고 이후 극단 생활도 재밌게 했다. 앞으로 특정 역할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어떤 역할을 맡든 성에 찰 만큼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 그래서 올해 방영 예정인 드라마 <굿 파트너>에서도 열심히 했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왜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 커지는 건지 의문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마음, 영원히 뜨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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