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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랑은 늘 어렵다', <정순> 배우 김금순
이우빈 2024-04-09

<정순>은 그 제목처럼 주인공 정순의 영화다. 디지털성범죄의 늪에 빠진 피해자이지만 정순을 피해자로만 보는 일차원적 시선은 온당치 않다. 영화가 그러한 시선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정순은 우리 일상 저변에 있는 중년의 블루칼라, 딸에게 지는 엄마, 타인에게 쉽사리 화내지도 못한 채 움츠러든 주변부의 인물이다. 정순을 두고 ‘복합적 캐릭터’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망설여진다. 정순은 복합적이라거나 다면적인 가상 인물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한, 당장 화면 바깥으로 걸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지독한 현실의 한 조각이다. 이러한 정순을 완성한 것은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김금순 배우의 몫이었다. 그는 정순과 자신의 닮은 점을 호쾌하게 설명하고, 중년이 경험한 사랑의 일면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정순>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정순> 이후 사랑하는 중년의 표상이 된 것만 같은 그에게 사랑과 인생이 무엇인지 배웠다.

-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후 2년 만의 개봉이다. 기분이 어떤가.

= <정순> 단톡방이 있어서 늘 인사는 나누지만 다 같이 얼굴 보고 만나기가 어렵긴 하다. 개봉도 개봉인데 오랜만에 감독님이랑 배우들을 만나서 기쁘다.

- 오랜만에 영화를 보니 정순이 왜 영수를 좋아하게 됐을지가 문득 궁금하더라. 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 같기도 하다. 첫눈에 반한 건지.

= 글쎄… 아무래도 첫눈에 얼굴 보고 반한 것 같진 않고. (웃음) 아마 같은 중년으로서 느끼는 연민에 가깝지 않았을까. 영수가 워낙 숫기도 없고 일도 배워야 하는 위치지 않나. 등산 갔을 때나 백숙 먹을 때 영수의 어려운 개인사를 들었고 집에 가보니 여관 달방에 혼자 사는 것도 보게 된다. 동병상련의 느낌으로 사랑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첫눈에 반했든 연민의 사랑이든 사랑은 늘 어렵다.

- 초반부의 정순이 탈의실에서 화장 중인 공장 동료에게 “누구한테 그렇게 잘 보이려고 하냐?”라며 능글맞게 놀리는 장면이 있다. 이런 걸 보면 정순은 마냥 선하거나 호감형의 인물이 아니라 주위에서 쉽게 볼 법한 자연스러운 인물이란 느낌이 든다.

= 그렇다.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똑같은 시간에 딸의 출퇴근을 도와주는, 가끔 등산을 가는 그런 인물이다. 실제 내 성격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더욱더 그런 자연스러움을 잘 표현할 수 있던 것 같다.

- 어떤 점이 닮아 있나. 지난 인터뷰에선 화를 내는 대신 허허실실 웃어버리는 점을 언급했다.

= 맞다. 그렇게 웃으며 넘기다가 갑자기 쌓여 있던 마음속 깊이 맺힌 마음을 한번에 분출하는 유형이다. 주위 사람들은 좀 놀랄 수도 있다. 또 하나 닮은 점은 사랑에 빠지면 약해진다는 거. (웃음)

- 얼마 전 개봉한 <울산의 별>에선 주인공 윤화를 연기했다. 윤화는 정순과 정반대로 한순간도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호통만 치는 인물이라는 게 재밌었다.

= 윤화 그 친구는 완전히 활화산이다. 정순이 좀더 섬세하고 여린 캐릭터라면 윤화는 완전히 다른 거지. 두 연기 중에 어느 쪽이 더 편하거나 하진 않았다. 연기야 늘 힘드니까. 에너지를 어떻게 저울질해야 하는지가 워낙 다르다 보니 양쪽의 고충이 다 있었다.

- 정순은 딸에게 져주기도 하는데 윤화는 자식에게 화만 낸다. 실제론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 아들들이 <울산의 별>을 보고 진짜 엄마랑 비슷하다고 말하더라. (웃음) 조용히 하라고 했다.

- 영화에선 정순이 디지털성범죄를 저지른 영수의 잘못을 다소 용서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딸 유진과 가장 크게 다툰다. 이때 정순이 가장 서럽게 울기도 하고.

= 아마 영수의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차이였던 것 같다. 영수가 이제 자기 빨간 줄 그어지면 일도 못하고 인생이 힘들 거라고 하니까… 중년의 연민으로 시작한 사랑이니만큼 정순도 많이 고민했겠지. 여하간 자식이 엄마 대신 일을 도맡아준다는 게 사실 창피하긴 했을 거다. 게다가 정순 마음대로 어떤 선택을 했다가 딸한테 욕까지 먹으니 얼마나 서러웠겠나.

- 그럼에도 다시 조금 밝은 얘기를 하자면, 정순이 영수와 출근 전에 한 호숫가에 들러서 조용하게 아침 풍경을 만끽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별다른 대사가 없는데도 분명한 애정이 느껴진다.

= 중년을 넘어가면 굳이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뭐 며칠 계획을 잡아서 어디 여행을 떠날 정도로 풍족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 아침에 그렇게 잠깐 시간을 내서라도 알콩달콩 그냥 사랑을 했다고 생각한다.

- <정순> 이후에 정순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 글쎄. 다시 사랑하긴 쉽지 않겠지. 사랑보단 일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 그 동네에만 너무 오래 살았고 운전을 새로 배우기도 했으니, 바깥으로 엄청나게 돌아다니지 않을까. 좋아하는 일도 새로 찾을 것 같고. 아마 해외에 가서 일을 구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어디 외국 남자와 비극 없이 평온한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웃음)

- <정순> 이후 중년의 사랑을 대표하는 배우가 된 느낌도 든다. 얼마 전 <LTNS>에서 젊은 유부남과 바람 피우는 은미를 연기했다. “누나는 LG랑 기아 다 좋아해”라고 불륜 상대를 혼내는 기막힌 인물이었다.

= 진짜 대사하기 민망하고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웃음) 하필이면 상대역인 (이)학주씨랑은 다른 작품에서 고모랑 조카 사이로 연기했던 사이여서 서로 더 웃음이 빵빵 터졌다. 언제 어디서나 중년의 사랑은 쉽지 않아.

- <살인자ㅇ난감>에선 영수 역의 조현우 배우와 함께 다시 한번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정순>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흠칫했을 거다.

= 그때도 자꾸 <정순> 생각이 나서 작품에 몰입이 안되더라. 너무 힘들었지. (웃음)

- <정순> 이후 워낙 많은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 같다. 차후 연기 계획은.

= 얼마 전 촬영 현장에서 고두심 선배님에게 갱년기를 어떻게 지냈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선배는 “일하기 바빴던 터라 그런 거 신경 쓸 새가 있었겠냐”라고 하시더라. 나도 아직 아들 둘 뒷바라지를 더 해야 한다. 자식들을 원망하는 건 절대 아니고. (웃음) 오히려 고맙다. 연기 활동의 가장 좋고 확실한 원동력이 돼주는 것 같다. 허리가 아파도 소처럼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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