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헤인스가 내털리 포트먼, 줄리앤 무어와 함께 신작 <메이 디셈버>를 촬영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평자들은 두 베테랑 여성배우가 러닝타임 내내 연기로 무한한 평행선을 달리는 영화가 나올 것이라 속단했다. 한데 <메이 디셈버>가 공개되자, 모두들 교차할 기미 없는 여성배우들의 연기 접전에 무한원점을 대담히 찍은 신예 찰스 멜턴을 이야기했다. 찰스 멜턴은 영화 속에서 13살에 급우의 어머니인 그레이시(줄리앤 무어)와 관계를 가진 후 그와 아이 셋을 낳고 살아가는 36살 남성 조를 연기해 뉴욕비평가협회, 전미비평가협회를 포함한 22개의 연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리버데일>, 피콕 오리지널 <포커 페이스>로도 주목받은 찰스 멜턴은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한국계 미국인 배우다. 지난해 칸영화제 직후부터 올해 3월11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메이 디셈버> 프로모션에 여념이 없던 찰스 멜턴이 영화의 개봉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그와 <씨네21>이 단독으로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한다.
- 조와 그레이시가 오물이 담긴 택배가 배달되자 대수롭지 않은 듯 능숙하게 해치울 때부터 당신과 줄리앤 무어는 마치 그 마을에 오랫동안 산 사람처럼 보인다. 해당 장면을 위해 리허설을 거쳤나.
= 23일 만에 촬영했기 때문에 리허설 시간이 따로 있진 않았다. 매 촬영 어떤 연기를 할지는 촬영 당일 토드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건조차 이 부부에겐 평범한 일상이다. 토드의 연출이 멋있는 이유가 그 장면에 있다. 오물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관객에게 그상자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생히 상상하도록 만든다. 토드는 감독으로서 강렬한 비전과 견해를 지녔다. 그는 현장에서 본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명확히 아는 연출자고, 모든 배우와 스탭들을 위해 협력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은 영화 초반 엘리자베스(내털리 포트먼)의 시선을 경유해 조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모습까지 염두에 두고 조의 외양을 만들어갔는지.
= 클럽에 처음 입장했다고 비유해보자. 누군가가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으면 자연히 그 사람을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구두 언어나 눈빛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역시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관객은 36살 남성의 육체를 보지만 그 속엔 13살 소년이 정체돼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이 겪은 외상과 경험은 모두 몸에 깃들어 있다. 정신이 표현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는 사춘기를 빼앗긴 인생을 살았다. 연민을 두고 조의 삶을 쪼개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 조의 구부정한 자세와 목소리가 눈에 띈다.
= 시나리오에서부터 뉘앙스가 살아 있었다. 배우로서 내가 할 일은 행간에 숨은, 얼어붙은 채 지나온 조의 인생을 찾고 그의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조는 목 주위만 울려 발성하고,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 지금 당신과 대화하는 나는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조는 (몸을 움츠리며) 계속 무언가를 감추려 하고 스스로를 방어하려 든다. 이런 태도가 대사나 소리 이상의 섬세함을 전할 수 있다. (이어 목소리 볼륨을 줄인다.) 내가 대화 중에 이렇게 목소리를 낮추면, 당신은 내 말을 듣기 위해 자연히 내쪽으로 몸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 엘리자베스가 처음 방문한 날, 한밤중 조는 엘리자베스가 출연한 화장품 광고를 반복 시청한다. 무엇이 조의 마음을 추동했을까.
= <메이 디셈버>로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정말 처음 받는 질문이다. 혹시 어린 시절 나와 같은 경험이 있나. 밤중 부모님이 주무실 때 몰래 컴퓨터를 켜거나(웃음) 스마트폰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의 SNS를 보던 기억 말이다. 조 또한 청소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억압당한 삶을 살던 조가 보고 싶은 걸 보고, 검색하고 싶은 걸 검색하며 안정감을 느끼는 몇 안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게다가 조는 젊은 남자다. 무언가에 끌리는 것이 당연하다. 청소년기부터 세 자녀를 양육하고 아버지와 아내를 돌보며 새로 시작하는 경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아버지, 아내를 돌보는 사람의 역할이 자신보다 평생 먼저였던 사람이다. 그런 조가 그 순간부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비로소 시작한 것이다. 그의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 오디션 때부터 조가 느낀 억압과 외로움에 공감했다고.
= 인간이라면 느끼는 다양한 외로움이 있다. 나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5년간 살기도 했다. 내 친구들은 한국인인데 나와 쓰는 언어가 달랐다. 나는 늘 남들과 달랐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과 살았고, 늘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다르게 보인다는 것도 인지하며 살았다. 공동체에 잘 녹아들어 살아온 편이지만 그럼에도 반(半)한국인 혹은 반미 국인이라는 인식은 고립감을 느끼게 했다.
- 당신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평택, 텍사스, 알래스카, 캔자스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평생 정체성에 관해 자문하며 살았을 것이다.
= 물론이다.
<메이 디셈버> 현장의 찰스 멜턴, 토드 헤인스, 줄리앤 무어(왼쪽부터).
- 반면 조는 36살에 이르러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실존적 고민을 시작한다. 36살에서야 정체성을 탐구하는 조가 어떻게 다가왔나.
= 내가 믿는 철학은, 인간은 정체성에 관한 자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일 중 아직 처리하지 못한 진보도 50살 혹은 60살에 만날 수 있다. 조의 입장에서 <메이 디셈버>는 그의 성장기기도 하다. 대개의 성장담은 청소년이 어른이 되는 이야기를 담지만 삶엔 여러 성장의 순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조는 방사선사로 살며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내부를 촬영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스스로의 속내는 진단하지 못했다.
- 지붕 위에서 아들 찰리(가브리엘 정)와 담배를 나눠 피우다 스스로 무너지는 장면을 촬영할 당시 몇번이고 다시 찍길 감독에게 요구했다던데.
=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조와 유사한 마음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날의 나는… 온종일 내가 너무 못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생각 하는 감정이 있는데 그 지점까지 표현하지 못했다. 어쩌면 조가 겪는 감정의 일부가 내게 영향을 미친 순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몰아치고 싶었다. 나는 쉬고 싶었지만, 쉴 수 없던 조가 심약해지는 첫 순간을 끝없이 표현해보고 싶었다. 테이크를 100번을 갔대도 계속 불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내가 여태 한 일 중 가장 나쁜 일이었다.
- 아이들의 졸업식을 바라보는 조의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땐 어땠나.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머금는 조의 얼굴이 복잡한 감정을 안긴다.
= 조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날이 나의 마지막 촬영일이었다. 오전 7시에 장면 하나를 찍은 후, 그날의 마지막 촬영을 진행했다. 대기하는 동안 촬영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몇번의 테이크를 거친 후 트레일러로 돌아가는데, 연출부에서 조금 더 찍어보자며 나를 불렀다. 그리고 추가 촬영분에선 토드가 컷을 외치지 않았다. 컷 없이 계속 연기한 그 순간이 내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계속 조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표정과 감정이 절로 나왔다.
- 인터뷰마다 한국영화와 한국 배우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리스트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이제 한국에 왔으니 (웃음) 몇 목록을 들려줄 수 있나.
= 한국영화와 한국 배우들의 신체 표현 능력에 특히 관심이 많다. 송강호 배우는 어떤 영화에 등장하든 그가 움직이는 모습에 주목하게 된다. 그가 <살인의 추억>에서 날아차기하는 장면은 몇번을 봐도 경이롭다. (성대모사를 시도하며) 이정재 배우가 <암살>에서 보여준 몸연기도 감탄스럽다. 한국영화를 볼 때면 나의 엄마(eomma), 삼촌 (samchon), 이모(imo)랑 이모부(imobu)로부터 내가 느낀 정서를 내 연기에 접목하는 상상을 한다. 사실 한국영화를 본격적으로 관람하기 시작한 지는 5년 정도 됐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나오는 복수물들을 좋아한다. 복수물을 한국만큼 잘 쓰는 나라가 없다. <악마를 보았다>만 해도 대부분의 영화의 결말에 제시될 법한 이야기를 초반 20분에 바로 풀지 않나. 그 영화에서도 배우들이 몸을 쓰는 방식에 눈길이 갔다.
- 넷플릭스의 <리버데일>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리버데일>로부터 직업윤리를 배웠다고 밝힌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 7년간 매해 10개월씩 22부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촬영했다. 긴 시간 같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언제든 연기할 준비가 바로 되어 있어야 하는 현장이었다. 앉은 채 대기를 계속해야 하는 현장이기도 했는데 그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배우로서 일하는 법을 배웠다. 말하자면 나의 훈련장이었다.
- 칸영화제를 시작으로 얼마 전 끝난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지난 1년간 시상식 레이스에 <메이 디셈버>와 줄곧 함께했다. 이 기억이 어떻게 남아 있나.
= 선망하던 배우들을 내내 만났다. 브래들리 쿠퍼, 에이드리언 브로디, 호아킨 피닉스…. 그들이 내게 들려준 말들도 있지만 혼자 간직하려 한다. (웃음) 시상식 시즌 동안 감상한 영화 중 최고는 <추락의 해부> 였다. (인터뷰일 기준) 이틀 전에 마침내 보았는데 모든 순간이 생생하다.
- <메이 디셈버> 속 엘리자베스는 복잡성과 도덕의 회색 지대에 놓인 캐릭터에 매료돼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어떤 캐릭터에 관심이 있나.
= 위대한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과잉하거나 심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역할의 크기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역할을 만나고 싶다. 어떤 배역은 치유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배우로 살기로 결심한 이유는 역할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곧 전쟁영화에 들어가는데,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아버지가 24년간 군복무 중 참전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나를 알아가고 싶고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