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인터뷰] ‘데드맨’ 배우 김희애, 매일의 책임과 매일의 소명
이자연 2024-02-06

이만재(조진웅)가 흘러가버린 지난 3년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건 심 여사를 만나면서다.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는 이름을 감춘 이를 만나 혈투에 빠르게 시동을 건다. 정치판 최고의 컨설턴트, 흐름을 바꾸는 전략가, 필요한 것을 어떻게든 손에 넣는 과감한 플레이어로서 심 여사는 이만재가 앞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시야를 밝힌다. 영리한 눈빛부터 확신에 찬 목소리, 불안정한 호흡까지를 그대로 구현한 김희애를 만났다.

- 제작보고회에서 심 여사를 두고 “여성배우라면 탐날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렇다고 생각하나.

= 심 여사는 어떤 환경에 있든 가장 선두에 선 여자다.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남성들보다 더 큰 힘을 지녔고 정치 판도 또한 그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된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그의 위력과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전보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이어오고 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강한 힘을 지닌 여성들이 필요하다.

- 심 여사는 자기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인물이다. 이만재 시점에선 아군인지 적군인지 단번에 파악하기 힘들다. 관객에게 심 여사의 위치를 단번에 알려주기보다 헷갈리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신경 썼나.

=심 여사의 태도에 물음표를 남겨서 관객이 그를 계속 파악하게끔 하고 싶었다. 다만 어떤 결론을 신경 쓰면서 그의 의중을 드러내려 하기보다 장면마다 심 여사의 역할과 쓰임에 충실하려 했다. 아무도 모르잖나. 진짜 심 여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계획해둔 것인지. 진짜 이만재의 무엇을 이용하고 싶었는지. 심 여사가 남겨둔 여백을 그대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가 실질적 빌런인지 아닌지 너무 빠져들려 하지 않았다.

- 한국영화의 3대 등장 신이 있다.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관상>의 이정재, <아저씨>의 원빈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3대 등장 신에 준할 만큼 심 여사의 등장도 무척 강렬하다. 이만재의 삶을 원상복구하기 시작한 변곡점에 나타나기 때문에 스토리상에서도 굉장히 주요한 지점이다.

= 나도 거기에 낄 수 있는 건가? (웃음) 첫 등장 신을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설렜다. 떨리기도 하고. 이야기가 막 흥미롭게 펼쳐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기대가 컸다. 그런데 비교적 쉽게 끝났다. 장면이 심플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만재를 이용하기로 한 심 여사는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이만재를 몰아세운다. 그래서 분장팀과 의상팀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 보통 사람들이 흔하게 입을 것 같지 않은 의상을 선택했다. 뭔가 다른 레벨, 다른 차원에 있는 여자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 심 여사는 전략가로서 능수능란하게 자기만의 수를 만들어낸다. 최근 3~4년간 배우 김희애가 맡았던 역할들은 공통적으로 지략가적 면모를 지닌다. <부부의 세계>의 선우도 자기만의 그림이 있고 <퀸메이커>의 도희는 정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배우로서 어떤 면이 전략가라는 설정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 아우~ 그런 역할 정말 어렵다. (웃음) 대사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근데 그걸 내가 한번 해내니까 그다음에도 또 그런 역할을 주는 것 같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캐릭터를 보면 똘똘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어떨 때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모여 또 다른 오늘의 나, 오늘의 캐릭터를 만든 게 아닐까.

- 그 전략을 많은 사람에게 설파하던 <데드맨> 장면은 심 여사의 결단력과 강단을 잘 보여준다.

= 동선을 생각하면서 긴 대사를 전달해야 해서 내게도 조금 벅찼던 장면이다. 테이크도 여러 차례 갔다. 성에 찰 때까지. 이때 특히 목소리와 전달력에 공을 들였다. 평소에도 대사 전달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연기할 때 발음을 흘리지 않고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이 가진 목소리를 어떻게 활용할지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목소리는 고유한 악기와 같다. 사람들이 말할 때 한 가지 음으로 말하지 않지 않나. 감정과 상황에 따라 메조포르테, 피아니시모 등 셈여림도 달라진다. 하나의 장면을 만들 때 이왕이면 반찬이 많은 식탁을 차리고 싶다. 왜 나는 그런 게 그렇게 재밌을까. (웃음)

- 한 장면에 담긴 고민을 들으니 문득 궁금해진다. 오랜 시간 배우로 활동한 김희애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배우의 역량’은 무엇인가.

= 요즘은 누구나 배우가 될 수 있다. 연기의 문턱이 과거처럼 높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갈 채널도 스스로 만들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가장 중요해진 역량은 오래가는 거다. 무조건 오래 남아 있는 것. 아무리 재능 있고 사랑받아온 배우도 여러 이유와 사정으로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너무 안타깝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떠나지 않고 오래 남아 있는 것도 재능이고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 재능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딱 하나! 운동이다. 배우라고 하면 무작정 자유롭고 즉흥적인 삶을 살 거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김혜자 선생님, 이순재 선생님도 굉장히 모범적인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나 역시 널브러지고 싶은 날이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늘어져버리면 다시 원상복구하기가 힘들다. 제자리뛰기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매일의 책임과 매일의 소명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우리에겐 그게 필요하다.

- 클럽 직원으로 등장한 최수영 배우와의 장면은 영화에서 한 템포 쉬어가는 타이밍이기도 하다. 자연스레 코미디가 녹아든 장면이었는데.

= 최수영 배우, 정말 최고다. 자기 역할에 필요한 완급 조절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이렇게 멋있는 후배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운이다. 가수들만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게 아니다. 배우도 다양한 사람들과 연기로 협업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간다. 그런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장르나 비중, 캐릭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 꿈은 장면 안에 너무 당연해 보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하나의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작은 소품처럼 방을 환하게 밝히고 싶다.

- 이전 인터뷰를 찾아보니 아직도 촬영장에 갈 때마다 긴장된다고. 베테랑 배우로서 현장을 즐길 것만 같은데.

= 아직도 촬영장을 생각하면 긴장되고 떨린다. 온몸이 경직된다. 그래도 이제는 집에 돌아가서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맛이 생겼다. 냉탕에 갔다가 온탕에 가면 활력이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요령이 좀 늘었달까. 나도 일하기 싫다. (웃음) 놀고만 싶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제 몫을 하는 건 중요하다. 과거 어린 희애가 쌓아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심 여사도 할 수 있는 거다. 심 여사를 젊은 친구들이 할 수 있겠나. 나도 과거의 내가 진화한 거다. 서툴고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져도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온 결과가 오늘이다.

- <데드맨>은 이름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희애, 두 글자를 돌아보면 지난날 자신에게 어떤 기쁨과 사랑을 주었던 것 같나.

= 음. (짧은 침묵 끝에) 힘든 생각만 든다. 나는 나를 많이 배려하지 못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뭐 별거 있나? 이 시간까지 무탈하게 일해 온 게 내가 나에게 준 기쁨이고 사랑이다. 뭘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귀한 일이다. 그러니 어린 친구들도 쉽게 일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