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선영을 통해 생애 보편적인 애환과 고락을 덤덤히 그려낸 배우 김선영은 능청스럽게 동네 분위기를 압도하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박찬숙으로, 밀도 높은 설움과 슬픔을 끌어안은 영화 <세자매>의 희숙으로 작품에 다양한 현실을 반영해왔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극성 맞은 학부모 조수희의 얼굴과 목 터져라 노동가요를 부르짖는 드라마 <퀸메이커> 화수의 얼굴이 동시대 같은 하늘, 다른 곳에서 안착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남편의 산업재해 합의금으로 새로운 터전을 찾은 <드림팰리스>의 혜정은 미분양 아파트가 숨긴 민낯을 그대로 직면한다. 유가족 농성장을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아파트를 할인 분양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해자만 지워진 전쟁터에서 피해자 간의 혈혈한 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배우 김선영은 혜정이 되어 또 다른 현실을 비춘다.
-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혜정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 혜정은 기업과 합의를 마친 피해자다. 지금까지 잘 다뤄지지 않았던 설정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자꾸만 도스토옙스키가 생각났다.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깊은 울림처럼, 이 여자를 좀처럼 외면할 수 없는 여운 때문에 집 창밖을 한참 쳐다봤다. 지금도 어딘가 살아가고 있을 혜정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자연스레 작품에 함께하게 되었다.
- 혜정은 모든 이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는다. 극 중 자신을 이해하거나 지지해주는 인물이 없지만 외로움을 일단 제치고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혜정의 일상적인 북받침과 감정의 강약 조절을 어떻게 드러내려 했나.
=연기에 관해선 따로 계산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 상황에 던져지는 것이다. 무대 연기를 선보일 때는 분위기를 살피고 기술적으로 우회하는 경우가 있지만 보통은 의식적으로 계산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직업인으로서 연기자가 감정을 쓰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액션이 더 어렵다. 맞고 떨어지고 부러지고. 안 시켜줘서 그렇지 이런 일은 백번도 할 수 있다. (웃음) 물론 <드림팰리스>는 다른 영화보다 프레임 밖에서 많이 울었던 영화다. 감독님이 컷 하는 순간 김선영이 느끼는, 혜정에 대한 연민이 밀려들었다. 혜정이 많이 외로워 보였다.
- 어떤 면에서 영화가 혜정을 너무 몰아세우기도 한다. 모든 잘못의 화살표가 혜정만 가리키지 않나.
=그 몰아세움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라 생각했다. 살다보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려움이 한꺼번에 쏟아지기도 하지 않나. 아니지,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 더할 때도 있다. 만약 드라마였다면 다음 회를 안 볼 수 없게끔 끝 부분에 짜잔~ 하고 극적인 무게를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충분히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현실 반영을 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혜정이 안에는 혜정이만 있지 않다. 몇 가지 상황에 처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보인다. 기업과 합의한 사람, 친구를 배신한 사람, 억울하게 몰린 사람 등. 이 시대에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관점을 관통하고 있다.
- <드림팰리스>는 졸속 건설부터 아파트 미분양 여파, 거주민의 이기주의, 산업재해까지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지만 정작 가해자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분양사 담당자도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가성문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대립하는 구도가 아니라 피해자간의 구도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정작 싸워야 할 사람은 없고, 피해자 사이에 일어나는 다툼으로부터 모순점을 발견하신 듯하다. 그래서 영화에는 유가족간의 문제, 입주민간의 문제가 더 부각되어 나타난다. 피해자는 이미 상처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또 다른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고, 다른 것을 관용적으로 바라볼 힘이 부족해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분란과 갈등은 더 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때 수인(이윤지)이 혜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내 인생에 껴들었냐”고. “다시는 내 인생에 나타나지 말라”고. 2년 동안 수인이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건 기업 탓인데도 혜정에게 그 화살을 돌리는 거다. 피해자들 사이에 드러나는 역설적인 문제를 잘 보여준다.
- 수인과 혜정의 감정이 절정에 치달은 건 아파트 복도 창문을 두고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함께 싸우던 유가족 대표의 죽음 뒤 모든 게 혜정 탓이라고 생각한 수인과 오해를 풀고 싶은 혜정의 감정이 팽팽하게 맞선다.
=그 장면에서는 ‘이게 정말 내 잘못인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하며 혜정이 감정적으로 처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첫 테이크를 가고 감독님이 굉장히 당황해하셨다. 당신이 그리던 그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수인의 집까지 운전해와서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혜정이 공포스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혜정이 광인은 아니잖나” 하고 말씀하시더라. 나는 혜정이 순간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독님은 혜정이 수인을 향한 갈망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보셨던 거다. 오히려 창문이 닫혀 수인으로부터 단절되는 순간, 그때부터 붕괴가 시작된다고. 그렇게 서로 다른 해석을 맞춰갔던 장면이다.
- 플래카드를 만들러 인쇄소에 간 혜정이 사장님에게 “가격은 똑같이 해주시는 거죠? 똑같이 해주시겠지~” 하고 머쓱하게 웃는 장면에서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여성의 얼굴이 그려졌다. 따로 디렉션이 있었던 건가.
=아니다. (웃음) 이게 <드림팰리스>에서의 첫 촬영이었다. 나는 주어지는 순간순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려 한다. 사장님이 안경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 찰나, 그 눈과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다. 만약 그 사장님이 “어머!” 하면서 반겼으면 나도 활달하게 인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장에서의 합이 중요하다. 연기는 당장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핵심이다. 극단 후배들이 너무 정제된 연기를 선보이면 “너무 준비된 연기 아니야?” 하고 묻는다. 연기는 결국 예측 불가한 또 다른 삶을 사는 것과 같다.
- 그동안 <동백꽃 필 무렵> <세자매> <퀸메이커> 등에서 여성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많이 그렸다. 중년 여성주인공이 많지 않았던 기존 콘텐츠 시장을 생각하면 뜻 깊은 변화로 보인다.
= 변화라는 게 늘 그렇다. 요만큼 변하고 이만한 저항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작중에 여자가 무조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여성 서사를 통해 얼마만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중년 여성도 가족, 자식의 성공, 건강 말고도 관심사가 무척 다양하다. 100년, 200년 전으로 거슬로 올라가보면 우리는 무수한 문학을 통해 남성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로 학습해왔다. 오이디푸스 신화부터 셰익스피어가 그린 갈등, 도스토옙스키의 남성주인공들까지. <세자매>도 그렇다. 신화 속 남자는 스스로 아킬레스를 끊고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여도 한 인간의 갈등과 고통으로 해석하지만, 희숙(김선영)이 허벅지를 자해하고 미옥(장윤주)이 술을 많이 마시고 미연(문소리)이 불륜녀를 때리면 폭력적인 여자라는 말이 더해졌다. <드림팰리스>도 산업재해로 가족을 잃은 두 여자의 이야기로 나아가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드문 작품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에서 내가 (이)윤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윤지야. 우리나라 영화제에서 이렇게 40대 여성 두명이 같이 레드 카펫을 걸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즐기자.”